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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나무 아래서](29) 당신은 누구십니까? 돼지를 키우는 사람이십니까!  

[무화과나무 아래서](29)  당신은 누구십니까? 돼지를 키우는 사람이십니까!  

궁인 목사(휴스턴 새누리교회)

당신은 누구십니까?

돼지를 키우는 사람이십니까! 

바울이 에베소에서 전도할 때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일어났다. 심지어 바울의 몸에 닿았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기만 해도 병이 떠나고, 악귀가 나갔다. 

그때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바울 흉내를 낸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악귀를 쫓았을 때, 악귀가 나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대들며 외쳤다.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는 누구냐’ 그리곤 바울을 흉내 내는 스게와의 일곱 아들을 덮쳐서 눌러 이겼고, 스게와의 일곱 아들은 옷도 없이 벗은 몸으로 도망갔다. 

많은 사람들은 신앙이 오래될수록 믿음은 성숙하고 진리 안에서 자유롭다고 믿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오히려 오래 믿을수록 두려움과 염려와 망설임만 많아진다. 이 땅에서 주님의 자녀로 당당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알지만, 능력이 없는 가짜가 될 때가 많다. 

그러나 우린 진짜가 아닌가! 100불짜리는 구겨지든, 찢어지든, 색이 바래든 100불짜리다. 구겨졌다고 구겨진 100불을 버리는 사람은 없다. 

마찬가지다. 우리 인생이 구겨진 것처럼 보이던, 찌그러진 것처럼 보이던, 우리의 진짜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구원한 세상 어떤 것보다 고귀한 존재이다. 이 땅에서 예수그리스도를 증명해야 할 사명이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다.’ 그러니 더는 세상에 풍조에 휩쓸리지 말고 타협하지 말고 살아야 한다. 사실 성경에 보면 세상과 타협하며 적당히 살아가는 유대인들의 모습이 많이 등장한다. 그중에 숨겨진 한 이야기가 바로 돼지 이야기다. 

‘갑자기 뭔 돼지 이야기인가?’ 하는 분도 있겠지만, 신약 성경에는 돼지가 단체로 등장하는 구절이 있다. 마가복음 5장 1~20절이다. 예수님은 거라사 지역에서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만난다. 그리고 귀신에게 그 사람에게서 나오도록 명령한다. 그때 많은 귀신은 옆에 있던 이천 마리 돼지 떼에게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결국 귀신들은 돼지에게 들어갔고, 귀신 들린 돼지들은 비탈길을 달려 내려와 모두 바다에 빠져 죽는다. 이 광경을 본 돼지 키우던 사람들은 예수님께 그곳을 떠나도록 간청하였다. 이것이 돼지 이야기의 전말이다. 

그런데 궁금증이 하나 생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동네에 돼지가 한두 마리도 아니고, 이천 마리나 있었을까? 유대인들이 돼지 삼겹살을 먹었을까? 아니다. 유대인들은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여겨서 먹지도 만지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부정한 돼지가 거기에 그렇게 많았을까? 정답은 비즈니스다. 그 지역에 로마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었고, 유대인들은 로마 군대에 돼지를 납품하고 있었다. 믿음보다는 돈벌이에 더 열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서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부정한 짐승을 키웠다. 앞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인 척했지만, 뒤에서는 말씀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사람들이 당시 유대인들이다. 

그런데 평행이론처럼 시대와 지역은 다르지만, 비슷한 일이 오늘, 우리에게도 벌어지고 있다. 앞에서는 신앙인이지만, 뒤로는 세상의 가치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 말이다. 그래서 ‘나는 예수를 사랑한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한 인도 승려 간디의 말이 오늘날 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면서 속으로 돼지를 키우지 말자. 이율배반적인 믿음은 버리자. 온전히 예수를 닮아가는 삶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명하자. 잘 생각해 보라. 개독교라는 말은 우리가 예수를 닮지 않아서 생긴 말이다. 그리스도인다운 삶이 없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 불편한 단어가 언제까지 사용되기를 원하는가! 

예전 우리 선배들은 예수쟁이로 불렸다. 여기서 ‘~쟁이’라는 말이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쟁이’는 ‘그것이 나타내는 속성을 많이 가진 사람’이란 뜻이다. 즉 예수의 속성을 많이 가진 사람이 ‘예수쟁이’였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가난했지만, 고난이 많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뭔가 ‘개독교’라고 불린다. ‘개’와 더 가깝다는 것인가? 개독교의 의미를 생각하기만 하면 머리만 아프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계심을 증명하며 살아보자. ‘개독교’라고 사람들이 이야기할 때, 조용히 입 다물고 침묵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삶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명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보자. 사도바울의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은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이 고백이 당신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괴로움을 기쁨으로 바꾸는 주님만 의지하며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닮아가야 한다. 어렵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망을 이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다. 언제까지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돼지를 키우겠는가! 당신 삶으로 그리스도를 증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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