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Select Page

[무화과나무 아래서](16)
억울해하지 말고 제대로 하라

<span style=" font: bold 0.8em Nanum Gothic, serif ; color: green;">[무화과나무 아래서](16)</span> </br><span style=" font: bold 0.5em Nanum Gothic, serif ; color: fuchsia;">억울해하지 말고 제대로 하라</span>

궁인 목사(휴스턴 새누리교회)

억울해하지 말고 제대로 하라

성경 속에서 최고로 억울한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뱀에게 속아서 에덴동산에 쫓겨난 아담과 하와인가?

아내의 모함으로 포도원을 빼앗긴 나봇인가?

왕의 불륜의 희생양으로 사라진 우리아인가?

아니면, 사단의 농간으로 모든 재산과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욥인가?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에게도 하나님은 가죽옷을 주셨고, 나봇의 원한도 엘리야를 통해서 풀어 주셨다. 우리아의 아픔도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해결해 주셨다. 욥마저도 고난 이후에 더 큰 축복을 받았다. 그러나 성경에는 한번 실수로 영영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버리고,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베레스 웃사(하나님이 웃사를 치심)라는 수치스러운 지명까지 남겨진 이가 있으니, 그는 바로 웃사다.

초등학교 때 처음 웃사의 이야기를 듣고, 이 사람보다 더 억울하고 불쌍한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왜? 하나님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고, 자신을 던져 의로운 일을 했는데, 오히려 죽게 되고, 수치스러운 지명만 남아버린 최고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웃사의 이야기는 법궤와 같이 시작된다. 이스라엘은 전쟁 중 법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긴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은 재앙이 뒤따르자 두려운 나머지 법궤를 이스라엘에 되돌려 주었다. 그 후 기럇여아림에 방치되어 있던 법궤를 다윗이 옮겨온다. 마침내 소 두 마리가 끄는 새 수레에 법궤를 싣고, 예루살렘을 향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쁨으로 수레를 따르면서 수금, 비파와 소고와 제금으로 연주하며 노래하고 춤추었다. 다윗도 감격과 기쁨을 억제할 수 없어 친히 수금을 탔다. 그야말로 축제의 현장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 건 수레가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였다. 수레를 끌던 소가 갑자기 뛰자 법궤가 떨어지려 했다. 그때 옆에 있던 웃사가 법궤를 손으로 받친다. 떨어지도록 둘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그 순간 하나님은 웃사를 치셨고, 웃사는 그 자리에 거꾸러져 죽었다. 웃사는 분명 최선을 다해 자신의 일을 한 것이다. 법궤가 떨어지는 우발적인 상황에서도 헌신적으로 막으려고 했다.

그런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웃사를 치셨고, 웃사는 죽어야 했을까? 무엇 때문에 이리도 억울한 일이 생긴 것일까? 최선을 다한 사람에게 죽음이라는 결과가 주어지는 것이 과연 정당하단 말인가?

그런데 여기에서도, 자신만의 판단이 등장한다. 자신의 경험과 생각이 가미된 것이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한 것이 아니었다. 웃사에게는 정확한 리액션이 없었다. 웃사는 고핫 자손으로 이들의 일은 언약궤를 옮기는 것이다. 이들이 평생을 통해서 배운 원칙 중에 하나는 언약궤를 손으로 만지면 안 된다는 것이다. 민수기 4장 5~6절의 방법대로 언약궤는 채(막대기 pole 혹은 지팡이 staff)를 고리에 끼워서 옮겨야 했다.

‘진영이 전진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들어가서 칸 막는 휘장을 걷어 증거궤를 덮고 그 위를 해달의 가죽으로 덮고 그 위에 순청색 보자기를 덮은 후에 그 채를 꿰고(민수기 4:5-6)’

‘진영을 떠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는 일을 마치거든 고핫 자손들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이 멜 것이며(민 4:15)’

언약궤는 가죽으로 덮고, 제사장이 채(막대기 pole 혹은 지팡이 staff)에 끼워서 어깨에 매야 하는 것이었다. 만지지 말라고도 신신당부한다. 성경은 분명히 법궤 다루는 방법을 정확히, 몇 번이나 반복해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웃사는 자신만의 방법을 사용했다. 수레와 소를 사용한 것이다. 신기술을 도입하였다. 어쩌면 이 방법이 가죽을 준비하고 궤를 덮는 것보다 편하고 안전했을 수도 있다. 더 오래 이동할 수도 있고, 준비하는 데도 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었다.

물론 웃사에게 정성이 없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새’ 수레를 준비했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에게 폐 끼치지 않는 나름의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그는 법궤를 옮기기 위해서 새 수레도 만들고, 소들도 준비했고, 멋들어지게 비파와 수금이 울려 퍼지는 훌륭한 ‘법궤 송환식’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그의 완벽한 준비에 큰 오류가 있었다. 그는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 불신자들의 방법을 사용했다. 수레를 사용한 것이 큰 불순종이었다. 수레가 무슨 대수냐 하겠지만, 수레 사용은 블레셋 사람의 방법이었다. 블레셋 사람들은 법궤를 옮길 때 소와 수레를 사용했다. 나름 멋들어지게 준비했지만, 이방인의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하면서, 돼지머리 올려놓고 무당 불러다가 굿한 것이다. ‘천지신명께 빕니다.’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로 바꿔치기한 격이다.

이것이 웃사의 억울함의 진실이다. 제대로 하지 않고, 자기 입장에서 조금 쉽게 하려다가 본질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우리도 마찬가지다. 일례로 항상 말씀을 곁에 두고 읽겠다고 스마트폰에 성경 어플 다운받았지만, 성경 더 읽고 있는가? 오히려 성경책 들고 다니는 것이 귀찮아져 아예 안 들고 다니지는 않은가? 우리도 처음에는 신앙생활 잘하겠다고 합리적인 선택을 하지만, 결국 순종을 잃어버리고 믿음을 저버리는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의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억울해하고 섭섭해한다. 웃사 같은 모습이 나에게 없는지 살펴볼 일이다.

미주침례신문 앱 다운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