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경일 목사의 세상에서 말씀 찾기] 후회
손경일 목사 – 새누리교회(미주)
후회
인생엔 많은 후회가 있지만 하나님은 후회가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민 23장 19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회’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적이 있습니다. 바로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신다고 말씀하셨을 때입니다.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삼상 15장 11a절
후회가 없으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여기에 쓰인 히브리어는 ‘나함’이라는 단어인데, 사람의 후회를 표현할 때 쓰는 ‘슈브’와는 다른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울로 인하여 크게 안타까워하시는 마음을 분명하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사울의 무엇이 대체 후회가 없으신 하나님께서 “후회”라는 단어를 사용하시게까지 한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가치”와 사울이 생각하는 “가치”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울에게 아멜렉을 넘겨주시며, “모든 생명을 다 멸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울왕은 좋은 것, 즉 자신이 보기에 가치가 있는 것은 남기고 가치가 없어 보이는 것은 쓸모없다고 판단한 것들만을 진멸했습니다.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삼상 15장 1절
사울왕은 가치에 대한 자신의 판단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가치는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이 말하는 가치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치 있게 보시는 것은 좋은 양이나 세상의 가치로 드려지는 제사가 아닌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눈은 세상의 가치를 따를 때가 많습니다. 내 가치를 세상의 가치에 맞추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갑니다. 돈이 많으면 가치가 있고, 잘생기면 가치가 있고, 높은 자리에 나아가면 가치가 있고, 똑똑하거나 유명하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곳에 가치를 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가치는 세상이 조롱하는 십자가에 있습니다. 십자가는 세상에서 보면 치욕이요 부끄럼이지만, 하나님께는 순종을 통해 인류를 구원한 가치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순종으로 가는 사람을 가치 있게 보십니다. 예수 믿고 부자 되고, 예수 믿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을 우선하지 않습니다. 비록 돈이 부족해도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십자가의 가치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하나님은 가치 있게 보십니다. 예수 믿고 부자 될 수 있습니다. 예수 믿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도 됩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있는지, 그 안에 십자가가 있는지를 하나님이 보십니다.
사울을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게 한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의 기준과 그의 기준이 달랐습니다. 승리하고 돌아오는 길에 사무엘을 만난 사울왕은 기분이 좋았습니다. 사무엘을 축복하며 자랑스럽게 이러한 말합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른즉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당신은 여호와께 복을 받으소서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삼상 15장 13절
사울왕은 칭찬을 기대했으나 사무엘의 반응이 이상합니다. 사무엘은 ‘왜 다 진멸하라 했는데 양의 소리와 소의 소리는 무엇이냐’며 역정을 내고 꾸짖습니다. 이에 사울왕은 이렇게 변명합니다.
사울이 이르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삼상 15장 15절
왜 그렇게 꾸중하느냐? 내가 이렇게 한 것은 다 나름대로 하나님을 생각해서 한 것인데? 왜 그렇게 말하냐? 라고 말합니다. 지금 사울왕은 진심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울 왕에게 청종은 전쟁에 나가서 아멜렉을 무너뜨리고 진멸한 것입니다. 좋아 보이는 것은 남긴 채 말입니다. 적어도 80%는 청종했다고 여긴 듯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100%의 청종을 말씀하셨습니다. 말씀하신 그대로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명령하십니다. 현실에서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배를 지어야 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상황입니다. 이런 경우 순종을 하더라도 자신의 생각을 쉽게 집어넣게 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더 좋을 듯해. 여긴 이렇게 창문이 하나면 답답하니 더 많이 만들자 등.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창 6장 22절
세상이 이해 못해도, 조롱받아도 그대로 준행했습니다. 그래서 노아입니다.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선포하라고 하나님께 명령받았습니다. 그런데 다시스로 도망갑니다. 왜냐하면, 요나의 기준엔 니느웨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들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요나에겐 니느웨는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기에 그들을 구원하여 살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요나의 기준에 이들은 죽어 마땅한 자들이지만 하나님의 기준에 니느웨 사람들은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기준으로 살아가고 계십니까? 어떤 가치로 살아가고 계십니까? 이 정도면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나의 만족 너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바라시는 인생의 모습을 바라보기 원합니다. 하나님이 후회하는 인생을 남기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인생을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