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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광 목사의 문학의 숲에서 만나는 진리의 오솔길] 기독교 문학 산책 – C. S. 루이스의 생애 산책(16)

[강태광 목사의 문학의 숲에서 만나는 진리의 오솔길]  기독교 문학 산책 – C. S. 루이스의 생애 산책(16)

강태광 목사(World Share USA대표)

C. S. 루이스 삶과 사상 산책 (16) 

루이스의 새엄마 무어 부인

C. S. 루이스의 삶은 평탄하고 투명했다. 부모, 형제, 아내 그리고 친구들에게 모든 것이 공개된 삶이었다. 루이스는 이렇게 살아도 비난받을 일이 거의 없었고, 의심스러운 삶도 거의 없었다. 옥에 티가 있다면 루이스 삶에 찾아온 두 여인이었다. 한 여인은 루이스가 뒤늦게 결혼한 헬렌 죠이 데이빗맨이었고, 다른 한 여인은 루이스 친구, 패디 무어(Paddy Moore)의 어머니로 30년 정도를 함께 살았던 제니 무어(Janie Moor) 부인이다.

가정이 있던 여인 헬렌 죠이 데이빗맨을 만나 사랑했고, 이혼한 그녀와 결혼했던 루이스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 친구들의 반대도 있었지만 둘의 관계를 아는 사람은 그를 크게 비난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사한 친구와 맺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30여 년을 함께 살았던 무어 부인은 오해와 구설수를 낳았고 지금까지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C. S. 루이스는 1917년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그가 대학 생활을 하자마자 1차 장교 후보생 과정에 입대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장교 후보생으로 훈련받으며 룸메이트로 훈련소 동기로 패디 무어를 만나 절친이 되었다. 훈련을 마친 C. S. 루이스와 패디 무어는 프랑스 전선에 투입되기 전 한 달간의 휴가를 받았다.

루이스와 패디 무어는 한 달간의 소중한 휴가를 알차게 보냈다. 그들은 3주간 패디 무어의 집에서 같이 보냈고 루이스는 벨파스트로 건너가 한 주간을 아버지와 함께 보냈다. 그 후에 이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두 사람은 혹시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돌아오지 못한다면 남은 사람이 전사한 친구의 부모님을 돌보기로 맹세하였다.

패디 무어와 C S 루이스는 1차 대전 격전지였던 프랑스로 투입되었다. 특히 무어 소위는 당시 최대 격전지였던 카이저 전투(Kaiser Operation)에 배치되었다. 독일은 미국이 완전히 참전하기 전에 승기를 잡으려고 강한 공격을 했고 영국군은 강력하게 저지했다. 이 전투 개시 후 곧 무어는 실종되었다. 무어는 이 전투 초기에 전사한 7,512명의 영국 육군 전사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무어 부인은 아들의 전사 소식을 통보받고 정신을 잃었다. 그런데 무어 부인은 C. S. 루이스의 아버지, 앨버트 루이스의 위로 편지를 받고 답장을 보냈다. 두 아들 패디 무어와 C. S. 루이스의 맹세를 언급하며 루이스가 자신에게 얼마나 좋은 아들인가를 설명하며 루이스와 함께 살 것을 천명했다.

제니 킹 무어 부인은 목사의 딸이었다. 윌리엄 제임스 애스킨 목사(Rev. William James Askins)의 6남매의 첫째로 태어났다. 제니 킹 애스킨은 목회자의 딸로 태어났으나 그녀가 18살 될 즈음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 후 그녀는 다섯 동생의 어머니 역할을 했고, 5년 후 아버지마저 죽자, 그녀는 동생들의 부모 역할로 동생들을 돌봐야 했다. 이 경험이 그녀를 주도적이고 강압적인 사람이 되게 했고, 이 모습이 훗날 루이스와 함께 살면서 나타났다고 본다.

제니 킹 애스킨은 1897년 8월 1일 목사의 아들인 코트니 에드워드 무어(Courtenay Edward Moor)와 결혼했다. 목사의 딸과 목사의 아들이 결혼했으니 좋은 가정이 되었으면 좋으련만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순탄하지 못했다. 그들은 아들, 패디 무어(Paddy Moore)와 딸, 모린 데이지 헬렌 무어(Maureen Daisy Hellen Moore)을 두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결혼한 지 10년 만인 1907년에 별거 상태에 들어갔고 브리스틀(Bristol)로 이사했다.

옥스퍼드를 입학하자마자 군대에 입대한 아들을 통해 무어 부인은 C.S. 루이스를 만났다. 그리고 프랑스 전투에서 다친 루이스가 브리스틀에 있는 야전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때 루이스를 돌봐주었다. 루이스는 아버지가 찾아와 주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앨버트 루이스는 아들의 병실을 끝끝내 찾아오지 않았다. 반면에 친구의 어머니 무어 여사는 루이스를 극진히 돌봐주었다.

군대에서 돌아온 C. S. 루이스는 1919년 1월부터 옥스퍼드에서 공부했다. 그리고 친구와 맺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병원에서 자신을 돌봐준 무어 여사를 모시고 살았다. 루이스는 친구와 맺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의 어머니 제니 무어(Janie Moore)가 죽을 때까지 그녀를 봉양했다.

루이스는 주변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길 만큼 무어 부인과 함께 지냈다. 혹자는 C. S. 루이스가 그녀에게 한때 로맨틱한 감정을 가졌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루이스가 아버지 집에 머물 때는 그녀는 매일 편지를 루이스의 고향 친구, 아서 그리브즈 집으로 보냈다. 그리고 어쩌면 성적인 관계도 맺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루이스는 평생 그녀를 어머니라고 불렀다.

무어 부인은 루이스와는 아주 다른 사람이었다. 그래서 둘이 같이 살기에는 쉽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주장이 강하고 요구하는 것이 많았으며 남을 지배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동생들을 공부시키려고 자신은 공부를 못해서 그런지 열등감도 컸다. 목사의 딸로 성장했는데도 그녀는 크리스천도 아니었던 것이 확실하다. 루이스가 크리스천이 되었을 때 자기는 소외되었다고 느꼈으며, 신앙생활을 같이 하려 하지 않았다.

C. S. 루이스가 무어 부인과 함께 사는 것을 가까이서 지켜본 루이스의 형 워런은 불만이 많았다. 무어 부인은 C. S. 루이스에게 집안일을 맘대로 시켰고 잔심부름을 시키기가 일쑤였다. 심지어 루이스가 중요한 글을 쓰는 중에도 무어 부인은 루이스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워런은 무어 부인이 루이스의 연구와 집필의 시간을 배려하지 않는 것에 큰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무어 부인은 좋은 면도 있었다. 그녀는 친절하고 따뜻한 여인이었다. 무어 부인 덕분에 그의 집은 친구들과 필요한 사람들에게 언제나 열려 있었다. 무어 부인이 루이스를 잘 돌봐주어서 루이스는 선천적인 소외와 고독에 빠져드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루이스의 전기 작가들은 루이스가 무어 부인과 함께 살면서 인생을 배워 다양한 장르의 글들을 쓸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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