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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牧會斷想] 돈에 팔려간 목사

[목회단상 牧會斷想] 돈에 팔려간 목사

지준호 목사(헌츠빌 은퇴, 자유기고가)

“돈에 팔려간 목사”

갓 목회를 시작했을 때 내 가슴은 생명이라도 내놓을 수 있을 만큼 뜨거웠다. 하나님의 도움을 목마르게 기다리는 사람들, 신앙의 수많은 질문을 품고 갈증을 호소하는 사람들, 진실한 목회자를 찾는 성도들, 천국의 모형이 그려진 교회의 주춧돌이 되기를 원하는 이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올 줄 알았다. 그리고 이들이 맑고 경쾌하고 고운 봄의 소리를 내며, 화려하고 달콤한 색깔과 향기로 벌, 나비를 모으는 이들이 될 것이라는 기대에 마음이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기다려도 기다려도 사람들은 오지 않고 나는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는 듯한 신세가 되었다.

부흥은 커녕 몇 명 되지 않는 성도조차 떠나는 건 아닐까 조바심하며 눈치 보기에 바빴다. 피와 살 같은 시간과 돈을 들이고 질문과 갈등 속에서 어렵사리 이해한 복음이 허망하게 느껴졌다. 감정을 뜨겁게 하고, 신비한 체험을 하게 하여 믿어지지 않는 것을 믿고 충성하고 봉사해 축복을 받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과 이성의 조화를 이루는 신앙의 즐거움을 누릴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리고 싶었으나 가족의 생존 문제가 목덜미를 또 잡아끌었다.

난 그만 돈에 팔려가는 목사가 되었다. 작은 교회를 떠나 큰 교회로 가기로 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될 것 같은 멀고 먼 곳의 보금자리를 향하여 무빙카를 운전하고 있을 때였다. 친구들과 헤어지기 싫어 울음을 그치지 않는 틴에이져 딸을 보며 가슴으로 울고, 삯꾼으로 전락한 서러움에 속으로 또 울었다. 그렇게 3일을 보내고 삯꾼이 아닌 목회자로서 부푼 꿈을 안고 새로운 성도들을 만났다. 진리 안에서 소통되고, 존경받고, 생명을 얻은 듯 어둠에서 빛으로 나오는 생기 있는 눈빛도 보고, 가족처럼 친근함을 나누는 행복을 누렸다. 한편, 삯꾼 된 대가의 허망함이 일어 또 남몰래 울고 또 울었다. 가족의 생계도 온전히 책임지지 못하는 가장이었지만, 물질을 초월한 청렴한 성직자라 자위하며 버텼다. 그러나 불평과 의심의 눈초리를 느꼈다. 참고 인내하면 하나님이 해결해 주리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선한 목사의 얼굴로 불의를 대하는 것은 너무도 힘겨운 일이었다. 그래서 의지하는 마음으로 나와 소통이 되는 이들을 바라볼 때면 그들은 너무 착하고 얌전한 사람들이 되어 있었다.

“교회 안에서 기득권을 유지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질투심과 이기심 그리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십자가의 은혜 아래서 그대로 가지고 있어도 되는 것일까? 신앙은 과연 무얼까?”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며 질문하고 또 질문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네 십자가는 네가 지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해 다시 외로움에 떨었다. 현실과 이상, 미움과 사랑 사이에서 나는 또 방황하며 울보가 되었다.

하나님이 바로 응답할 듯한 이야기와 까르르 웃을 소재를 적당히 섞어 감정을 뜨겁게 하는 설교를 시도했다. 그러나 “목회가 무얼까?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단 한 번뿐인 나의 인생과 가족은 내게 어떤 존재일까?” 하는 고민이 나를 외롭게 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고, 속세를 초월한 무감각한 영혼처럼 시스템 안에서 해야 할 일들을 했는데 어느새 은퇴할 나이가 됐다. 사람들이 이야기했다.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한 곳에서 목회를 할 수 있어요?”

신앙과 목회에 관해 새롭게 정리하고 싶었다. 자유로워진 난 신앙이 싹트기 시작한 배경부터 그 여정을 글로 쓰기 시작했다. 생생한 추억이 떠올랐다. 네 살 정도나 되었을까?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와 분리되어 있는 나를 느끼고 외로움을 느낀 적이 있었다. 몇십 년이 지난 지금, ‘인간으로서 존재의 고민이 시작된 순간’이 바로 그때였음을 알았다. 분리된 존재가 하나 되는 신앙의 신비를 그때부터 차곡차곡 경험해야 했는데…. 대신 난 가슴속에 질문의 뿌리를 내리고 방황하며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 그렇게 살았다.

‘하나였다 분리된 나, 그리고 다시 하나가 되어 가는 것이 신앙’임을 아는 것이 새롭다. 나는 하나님 품 안에 있다가 분리된 존재로 세상에 등장했다. 그리고 현실과 이상, 감정과 이성, 과거와 미래, 자연과 나, 타인과 나 사이에서 다름과 분리로 인해 아파하며 살았다. 때로는 감정에 휘둘리고, 때로는 이성에 휘둘리고, 때로는 현실에, 때로는 이상에, 때로는 율법에, 때로는 이기심에, 때로는 질투와 욕심에 휘둘리면서…. 이런 것을 모르고 내 지식과 의지에서 나온 지혜를 말씀으로 착각하고 사명을 감당하려고 발버둥 쳤다. 결국 난 가면을 쓰고 살면서 나 자신에게도, 가족에게도, 세상에게도 외면당한 듯한 인생의 열매를 얻었다.

요즘 나는 다름과 분리됨이 진리 안에서, 사랑 안에서 조화롭고 아름답게 하나로 이루어지도록 하며 산다. 그리고 작아질수록 작은 것이 귀하게 여겨짐을, 무지한 피조물임을 아는 만큼 귀가 열림을, 내 삶의 아주 작은 것들에게 성실하고 진실하게 낮은 자세로 마주하며 산다. 그리고 내 글에 나타나는 나의 내면을 거울 보듯 하며 은혜에서 인도 받는다. 그동안 놀아주지 못했고 돌보지 못했던 가족과 정직하게 소통하며 사랑하는 즐거움과 생명력을 맛보고 있다. 더러는 내게 이야기한다. “이제는 즐기며 살라”고. 나는 웃으며 질문한다. “즐기는 것이 무얼까?” 종종 독자들에게 내 글에 대한 공감의 피드백을 받을 때면 내가 몰랐던 즐거움을 천 배 만 배 느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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