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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나무 아래서](17)
구멍 난 양말을 드러낼 때, 하나님의 임재는 시작된다!

<span style=" font: bold 0.8em Nanum Gothic, serif ; color: green;">[무화과나무 아래서](17)</span> </br><span style=" font: bold 0.5em Nanum Gothic, serif ; color: fuchsia;">구멍 난 양말을 드러낼 때, 하나님의 임재는 시작된다!</span>

궁인 목사(휴스턴 새누리교회)

구멍 난 양말을 드러낼 때, 하나님의 임재는 시작된다!

신발을 벗었을 때, 구멍 난 양말을 신고 있으면 정말 당혹스럽다. 특히 점잖은 자리에서 구멍 난 양말을 신고 있다면 마음이 어려워진다. 모든 사람이 내 양말만 보는 것 같다. 나도 한국에서 사역할 때 그런 경험이 있다. 장례 예배 사회를 봐야 하는데, 그만 지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주차장에서부터 계단을 몇 계단씩 오르며 얼마나 뛰었는지 모른다. 그나마 다행히 설교할 목사님과 거의 동시에 장례식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신발을 벗는 순간 구멍 난 양말을 발견했다.(한국 장례식장은 신발을 벗고 들어간다) 그것도 아주 큰 구멍이난… 분명 아침에는 멀쩡했데, 아마도 뛸 때 구멍 난 모양이다. 여간 창피하고 난처한 순간이 아니었다.

게다가 장모님이 하셨던 말이 머리를 스쳤다. 어떤 목사님이 발가락 양말을 신고 장례식장에서 설교하는데, 그 발가락 양말 때문에 웃음을 참느라 고생했다는 이야기다. 경험한 분은 알겠지만, 장례식장에서 웃음 참는 건 큰 고역이다. 그런데 내가 장례식장에서 웃음거리가 되는 상상이 머리에 계속 맴돌았다. ‘발가락 양말도 아니고, 구멍이 난 양말을 신고 사회를 보면, 성도들에게 얼마나 방해가 될까!! 얼마나 웃음거리가 될까.’ 아찔했다.

그래도 당시 목사 경력이 좀 있다 보니 지혜를 발휘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엄청난 위기 대처능력이다. 구멍 난 부분을 엄지발가락과 검지발가락 사이에 넣고 양 발가락으로 힘을 꽉 주어서 구멍이 보이지 않도록 한 것이다. 발가락 양말처럼 보였을지는 모르겠지만 구멍은 안 보였다. 예배를 무사히 잘 마쳤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라. 발가락 힘으로 구멍 난 양말을 잡고서 티 안 내려고 엉거주춤 장례식장을 돌아다니는 목사를. 정말 잊을 수 없는 창피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창피한 순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시 신발을 신었을 때, 엄청난 기쁨과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의 안도감이라니,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수치로부터 벗어나는 기쁨의 순간이었다.

사람은 모두 자신의 수치를 감추고 싶어 한다. 자신의 부족한 부분이나, 연약한 부분이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래서 약점은 기를 쓰고 가린다. 거짓으로 가리고, 교만함으로 가리고, 강한 척하면서 가린다. 때로는 재력으로, 능력으로, 학력으로, 미모로 가린다. 멋진 가면 만들어서, 철저히 자신의 약점을 가리고 싶어 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마음이다. 그런데 참 안타깝게도 우리의 가면은 생각처럼 튼튼하지도 않고 오래가지도 않는다. 오히려 세월이 지날수록 비슷비슷해져 간다. 그래서 이런 유머까지 생겼다.

40대가 되면 젊었을 때 예뻤든 안 예뻤든 관계없이 나잇살과 주름 때문에 미모가 평준화되고, 50대는 학벌이 높든 낮든 많이 알든 모르든 좋은 학교 나왔든 안 나왔든 건망증 때문에 지성이 평준화되고, 60대는 넉넉하든 가난하든 돈이 줄어들기 시작해서 재력이 평준화되고, 80대는 병원에 있는 사람이나 집에 있는 사람이나 비슷해지고, 90대는 살아있는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거의 비슷해서 생사의 평준화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우스갯소리지만, 설득력은 있다. 우리가 자신을 가리려고 만든 가면들은 세월이 지나가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는 것도 있다. 바로 하나님의 임재다. 이 임재는 놀랍게도 나의 약함을 드러내는 순간, 가면을 포기하는 순간 경험하게 된다. 나를 보호하고 있던 신발을 벗고 구멍 난 양말을 보이는 것처럼 나의 수치를 주 앞에 드러내는 순간,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상처를 품고, 우리를 사랑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내가 너의 주인이고, 내가 너를 책임진다.

모세가 그런 경험을 하였다. 호렙산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을 때, 모세는 거기로 향한다.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호기심과 놀라움으로 그곳에 서게 된다. 그때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한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여호와가 임재하신 그곳은 거룩한 곳이고, 너 모세는 신발을 벗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신발을 벗으라고 하였을까?

모세는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마음이 많았다. 애굽에서 실패하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하였던 모세는 두려움, 무력감, 절망감, 외로움, 처량함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첫아들의 이름마저 ‘내가 타국에서 객이 되었다’라는 뜻으로 지었으니, 그의 처량함과 자기 연민이 얼마나 대단했을지 알만하다. 얼마나 자기 자신을 보호하고 싶었겠는가! 얼마나 방어적이 되었겠는가? 모세는 더 상처 받고 싶지 않아서 철저히 자신을 보호하는 삶을 살았다.

그런데 신발을 벗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에만 급급하던 모세에게 가면을 벗으라는 의미였다. 방어막을 버리라는 것이다. 자신의 수치를 가리고자 하는 모든 시도를 포기하라는 것이다. 신발은 발을 보호하고, 냄새나고 더러운 나의 수치를 가리는 것이다. 그래서 신발을 벗고 맨발을 드러낸다는 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유대인들도 맨발로 다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에게 맨발을 드러내라고 말한다.

이것은 혼자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려는 안타까운 노력을 그만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들어오라는 의미다. 혼자서 자신을 방어하며 살아온 모세에게 하나님이 ‘내가 너의 주인이고, 너를 책임진다’고 선포하는 순간이다. 당시에는 주인만 신발을 신을 수 있었다. 노예는 신발을 신을 수 없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신발을 벗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모세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인 되신 여호와가 모세를 보호하고 도울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놀라운 은혜 아닌가?

나는 여전히 더럽지만, 나의 약함을 드러내고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내려놓을 때, 주님이 나를 책임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당당하게 맨발로 걷는 모든 발걸음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선언이다. 비록 맨발로 서 있는 것이 힘들고, 발바닥에서 전해지는 현실이 너무 고통스럽더라도, 맨발로 걷는 그 걸음을 주님이 책임진다는 것이다.

맨발로 서는 순간 거룩함의 일부가 된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여기는 거룩한 땅이라고 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라고 했다. 그런데 신발을 벗고 나의 권리를 포기하는 순간 모세도 거룩함의 일부가 된다. 우리가 나의 가면과 권리를 포기하고, 주에게 모든 것을 의뢰할 때 우리는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거룩해진 당신의 자녀를 주님은 책임지신다.

모세가 온전한 거룩함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를 때,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게 된다. 광야라는 거친 인생을 살지만, 만나와 메추라기라는 하나님의 돌보심과 구름기둥과 불기둥이라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다. 한순간도 하나님의 임재가 그들을 떠난 적이 없다. 온전히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 그들은 광야의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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