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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광 목사의 문학의 숲에서 만나는 진리의 오솔길] 기독교 문학 산책 – C. S. 루이스의 생애 산책(14)

[강태광 목사의 문학의 숲에서 만나는 진리의 오솔길]  기독교 문학 산책 – C. S. 루이스의 생애 산책(14)

강태광 목사(World Share USA대표)

C. S. 루이스 삶과 사상 산책 (14) 

루이스의 아내 죠이 데이비드 맨(1)

C. S. 루이스가 명성을 얻고 특히 대중적인 기독교 변증가로 활동하자 많은 비난과 비판을 받았다. 유명한 방송 설교자와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비난과 비판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불가지론자들은 C. S. 루이스에게 Heavy 루이스라는 별명을 붙였고,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루이스의 신학 부재를 지적했고, 근본주의자들은 문학적 성경해석과 범 종교적 박애 사상을 공격했다. 루이스는 대중적인 전도자와 변증가로 활동하며 그야말로 사방에서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이 모든 비판과 비난보다 더 신랄하고 강력한 비난은 헬렌 죠이 데이빗 맨과 결혼한 것에 대한 비난이었다. 이 비난과 비판이 강력했던 것은 루이스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루이스의 주변 사람들은 60이 다된 노총각이 사십대 이혼녀에게 장가가는 것을 마뜩잖게 생각했다. 더욱이 그녀는 아이 둘이 있는 미국 여성이었고 심지어 공산주의 활동 경력까지 있었다. 루이스의 친구들은 모든 점에서 찬성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천재적인 영국의 인문학자와 매력적인 미국의 여인은 1956년에 결혼했다. 헬렌 죠이 데이빗맨은 C. S. 루이스를 만날 즈음 촉망받는 음악가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그녀는 매주 1권 이상의 책을 읽었던 독서광이었다. 아울러 그녀는 글쓰기를 즐겼고, 그녀의 시(詩)들이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되는 상황이었다. 이런 데이빗맨은 C. S. 루이스에게 매력적으로 보였다. 특히 시를 썼던 루이스는 그녀가 시인이라는 점이 무척 끌렸던 것 같다.

헬렌 죠이 데이빗맨은 여러 가지 면에서 탁월한 여성이었다. 어린 시절 학교 지능테스트(IQ Test)에서 기록을 경신했던 수재였으며, 학창시절에는 음악적 재능도 탁월했었다. 특히 그녀는 쇼팽의 곡들을 아무런 연습도 없이 초견에 피아노를 연주해서 주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는 탁월한 연극의 재능도 보였다. 셰익스피어 연극 대본을 한번 읽고 대사를 암기하여 연기를 선보여 주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헬렌 죠이 데이빗맨보다 네 살 어린 남동생 하워드 데이빗맨은 누나에게 열등감을 가졌던 경험을 고백했다. 그의 누나 죠이는 똑똑하고 적극적이어서 자랑스럽기도 했고 질리기도 했다고 한다. 하워드 데이빗맨도 탁월했었다. 그는 버지니아 주립대학을 졸업 후 의과대학에 진학하여 정신과 의사로 뉴욕 맨하탄에서 병원을 운영했었다. 그는 누나 죠이 데이빗맨의 글쓰기 능력에 야코가 죽어 누나가 죽기 전까지 책을 출판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죠이는 많은 재능 가운데 시작(詩作)을 지속해서 개발했다. 그녀는 대학 시절에 시를 몇 편 발표했는데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드디어 1936년 1월에 시카고 지역 유명한 시 전문잡지 ‘시계(Poetry)’에 그녀의 시들이 실렸다. 시 전문잡지 ‘시계(Poetry)’는 당시 유명한 시인이요 문학 평론가였던 해리엇 먼로(Harriet Monroe)가 편집장이었던 권위 있는 시 전문잡지였다.

죠이 데이빗맨의 재능을 알아본 해리엇 먼로(Harriet Monroe)가 그녀를 ‘시계(Poetry)’의 편집위원과 시 선정위원으로 임명했다. 죠이 데이빗맨은 교사직을 그만두고 시(詩) 전문 잡지사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죠이의 시작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이런 과정을 통해 죠이는 점점 시인으로 자리매김을 했다.

죠이는 스물세 살에 당시 유명한 시인이요 출판전문가였던 스티븐 빈센트 베넷(Stephen Vincent Benet)의 주목을 받았다. 스티븐은 죠이의 시들을 묶어 젊은 작가 시집 시리즈의 한편으로 출판하도록 도와주었다. 예일대학교 출판부에서 발간된 이 시집은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이 시집 때문에 죠이는 뉴욕에 유명한 문학출판사였던 브란트앤브란트(Brandt and Brandt)와 맥밀런(Macmillan)의 작가로 활동하며 책을 발간했다. 이것은 시인으로 어마어마한 성공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작가와 출판업계 종사자로 죠이 데이빗맨은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했다. 이것은 당시 지식층에 유행하는 일종의 유행병이었다. 사회주의를 따르다 공산주의를 신봉하던 그녀는 자본주의와 미국의 사회제도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그녀는 공개적으로 민주당과 공화당을 비판했고 공산주의자 전문 잡지사에 파트 타임으로 편집을 도왔다.

죠이는 공산주의 활동을 하다 린제이 그례샴(Lindsay Gresham)의 매력에 끌리게 되었다. 그례샴은 소설가, 기자, 기타 연주자, 성악가로 활동했다. 이런 다양한 능력을 보유한 그례샴과 사랑에 빠져 결혼한 그녀는 두 아들을 낳았는데 남편의 무책임한 모습에 실망하게 되었는데, 남편이 사촌과 불륜 행각을 벌이는 것에 실망하여 낙심하며 고통당할 때 하나님의 존재를 자각하고 하나님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임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읽던 죠이가 만난 책이 C. S. 루이스의 책이다. 그녀는 성경과 C. S. 루이스의 글을 읽으며 신앙을 키우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그녀와 비슷한 영적 상태에 있었던 채드 웰시(Chad Walsh)가 뉴욕 타임즈에 기고한 글이 C. S. 루이스에 관한 글이었고, 몇 달 후 “회의론자들의 사도, C. S. 루이스(C. S. Lewis: Apostle to the Skeptics)”란 책을 발간했다.

죠이는 이 책을 읽고 저자인 채드 웰시(Chad Walsh)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루이스에 관한 궁금증을 풀었다. 그리고 채드의 조언대로 루이스의 모든 책을 읽게 되었고 루이스가 영향을 받았던 챨스 윌리암, 죠지 맥도날드, 체스터톤, 도로시 세이어즈 등의 책들도 탐독하게 되었다. 죠이의 신앙도 성장해서 죠이는 두 아들과 세례를 받았다. 채드나 그녀가 출석한 뉴욕교회 담임목사에게 그녀는 거듭난 사람으로 보였다.

채드 웰시는 죠이에게 영국의 작가인 루이스에게 편지를 보내 보라고 권했다. 루이스의 책에 관한 그녀의 생각과 질문들을 적어 보내면 루이스가 회신을 보내 줄 것이라고 말했다. 채드의 권면을 듣고 죠이가 용기를 내어 루이스에게 편지를 쓰기까지 2년이 걸렸다. 죠이가 루이스에게 처음으로 편지를 보낸 것이 1950년 1월이었는데, 이 편지로 두 사람의 특별한 만남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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