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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웨스턴 신학칼럼-이장렬 교수]
야고보와 요한의 과오: 격변의 시대가 우리에게 준 기회

<span style=" font: bold 0.8em Nanum Gothic, serif ; color: green;">[미드웨스턴 신학칼럼-이장렬 교수]</span> </br><span style=" font: bold 0.5em Nanum Gothic, serif ; color: fuchsia;">야고보와 요한의 과오: 격변의 시대가 우리에게 준 기회</span>

이장렬 교수 – 미드웨스턴 신약학교수

야고보와 요한의 과오: 격변의 시대가 우리에게 준 기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주님은 세 번에 걸쳐 다가오는 자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예언하신다(8:31; 9:31; 10:33-34). 그중 마지막이면서 가장 상세하게 묘사된 세 번째 수난 예언이 마치고 나서 ‘수제자’ 그룹에 속하는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자신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들어 달라며 주님께 억지로 떼를 쓴다. 필자 같으면 바로 확 다 뒤집어 놓을 만큼 즉시 ‘열’을 받았겠지만, 주님은 그런 제자들을 향해 인내와 친절함으로 반응하시며 무엇을 원하는지 물으신다. 그때 야고보와 요한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10:37).

마가복음 10:32-45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예언과 이 두 제자의 요구를 극적으로 대비한다. 죽기까지 낮아져 섬기시는 예수님과 그저 높아만 지려는 제자들 간의 대조가 생생히 드러난다. 마가는 자기를 낮추어 섬기는 이가 오히려 크다고 여김을 받는 하나님 나라의 숭고하면서도 역설적인 가치와 (가능하면 ‘고상하게’ 하지만 안 되면 악랄하게라도) 높은 곳에서 타인의 섬김을 한바탕 누려보려는 세상 나라의 가치를 극명하게 대조시킨다(막 10:42-45).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으신다. 그리고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가장 낮은 곳에서 섬기고자 대적자들이 우글거리는 예루살렘으로 향하신다. 그런데 막상 ‘최측근’ 제자군에 속한다는 야고보와 요한은 이런 예수님께 자신들만 높은 곳에서 섬김을 받게 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주님은 자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거듭 말씀하는데, 주님을 가장 가까이서 따른다는 야고보와 요한은 곧바로 누릴 ‘영광’만 논한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서 참으로 다행이지만, 이때 야고보와 요한이 바로 교회 개척을 했다면 ‘곧바로영광교회’를 세웠을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영광은 고난을 통과하지 않은 영광이다.

야고보와 요한의 상태가 너무나도 서글프다. 예수님이 정확히 진단해 주신 대로, 이들은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깨닫지 못한다(10:38).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비록 이들이 주님과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만 참된 대화는 부재하다. 이들은 십자가 없는 즉각적 영광이라는 허영에 사로잡혀 그저 자신들이 원하는 바만 줄곧 이야기하고 자신들이 듣고 싶은 바만 취사선택해서 듣는다(35-40절 참조).

하지만 그런 서글픈 모습이 그리 낯설지만도 않다. 우리 주변에도 그리스도인이라 자부하면서 ‘곧바로 영광’의 허영을 추구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번영신학자들이 가장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십자가 없는 면류관, 고난 없는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 어찌 야고보와 요한만의 모습이며 또 어찌 번영신학자들만의 행태이겠는가? ‘십자가 없는 면류관은 없다!’고 선포하며 공개적으로 번영신학을 정죄하는 우리 역시 은근슬쩍, 두 눈을 잠시 감고 자신만의 은밀한 ‘곧바로 영광’ 추구를 묵인한다. 입으로는 신학적으로 옳은 말만 골라서 하지만, 치유받아 침상을 들고 가는 것(2:12)을 좋아할 뿐, 사명받아 십자가 지고 가는 것(8:34)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주: ‘침상을 들다’와 ‘십자가를 지다’에서 사용된 ‘들다’와 ‘지다’는 원어로는 같은 동사[헬라어: 아이로]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대신 소위 ‘OO 하는 법 O 가지’에 더 쉽게 호응한다. 그래서 우리는 ‘따분하고 부담스러운’ 십자가 지는 제자도 대신에 즉각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자극적이고 화끈한 ‘사역의 기법’들을 좋아한다. 우리는 그렇게 야고보와 요한처럼 ‘곧바로 영광’이란 허상을 앙모한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그 시작점부터 “곧바로(헬라어: 유쑤스)”라는 단어를 통해 독자들을 복음서의 종착점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집중하게 한다. 마가복음 첫 장에만 10회 이상 등장하는 “곧바로”라는 부사(adverb)는 내러티브 전반에 걸쳐 총 40회 정도 사용되는데,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서 서시는 장면(15:1), 십자가 처형 판결로 이어지는 그 장면을 기점으로 종적을 감춘다. 간략히 말해서, 마가는 “곧바로”라는 단어를 통해 독자들을 주님의 십자가로 긴박하게 이끌어 간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우리가 곧바로 추구해야 할 바는 허영으로 가득한, 세상적 영광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이다(8:34).

지난 몇 달간 예상치 못한 격변의 시간을 계속 경험하면서 이전에 누리던 것들을 얼마나 당연시했는지 반성하는 목소리가 높다. 그와 함께 우리가 그간 얼마나 하찮은 것들에 목숨 걸며 살았는지에 대한 성찰의 목소리 역시 높다. 아이러니하게도, 삶의 여러 측면에서 큰 상실과 제약을 경험하는 격변의 시대가 사소한 것에 인생 걸고 십자가의 제자도에서 ‘탈영’했던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목숨 거는 인생(10:29-30)으로 복귀할 수 있는 의미심장한 기회라고 생각한다. 십자가 없는 승귀(exaltation), 고난 없는 면류관, 제자 됨의 대가와 지불 없는 ‘곧바로 영광’이란 허영으로부터 주님 가신 그 길로 돌이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내어 주신 예수님의 래디컬(radical)한 섬김을 본받을 수 있는 고귀한 기회다.

‘곧바로 영광’을 추구하던 철없는 제자들(이게 꼭 남의 이야기만은 아니다)을 향한 주님의 질문이 귓가에 생생하게 울려온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침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막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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