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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간증] 한반도 복음통일의 계절이 긴박히 왔다 (2)

김요셉 목사 (가명)

북한 복음화를 위하는 사명자 (미주)


한반도 복음통일의 계절이 긴박히 왔다 

2. 북한 사역의 배경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세례)를 베풀고”(마태복음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세례)를 베풀고”(마태복음 28:19)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사도행전 1:8) 

1988~1989년 뉴욕에 북한 외교부가 설치됐다. 어느 날 평양에서 파송된 대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미국에 머무는 한인 교포들의 우호 증진 차원에서 함께 저녁 식사를 하자”는 것이었다. 식사 중에 “재미 한인 대표들을 인솔해 평양을 방문해달라”는 공식적인 초청을 받았다. “평양 봉수동에 북한 김일성 정부 때 말살되었던 교회가 다시 세워지고 첫 번째로 신축된 교회 헌당식과 부활절 예배에도 참석해달라”는 요청도 받았다. 

나는 15명의 대표단을 이끌고 평양에 세워진 교회를 방문하여 성경과 찬송가, 그리고 음향시설을 전달했다. 미국 교민단 인솔 대표로 인사 말씀과 부활절 예배 기도 순서를 부탁받은 나는 “예수님이 무덤에서 부활하신 것처럼 엄동설한에 한파로 얼어붙은 북한 땅 방방곡곡에도 복음의 꽃이 만발하고, 충만한 성령의 봄바람이 되살아 나리라”라는 내용의 기도를 했다. 애타는 마음으로 분단 후 북한 평양에서 첫 번째 거행되는 부활절 예배에 해외 교포로 첫 번째 공식 대표로서 간절히 기도를 하니 성령님의 임재하심을 느꼈고 기도가 끝나고도 마음에 은혜와 감동이 흘러넘쳤다. 기도를 담대히 마치고 자리로 돌아오니 옆자리에 앉았던 목사님이 농담을 던졌다. 

“공산국가에 들어와 그렇게 위험한 기도를 하시면 어떡합니까? 예배 끝나고 목사님 잡혀가시는 거 아닙니까?” 

농담이었지만 그 말을 듣고 조금 전까지 성령님의 임재를 경험했던 나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주님, 설마 아니겠지요?’ 

이번에는 다른 목사님이 메모지를 건네며 농담했다. 

“목사님 평양 감옥에 들어가시면 바울처럼 옥중 서신을 남기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메모지라도 넉넉히 챙겨드리겠습니다.” 

두 분의 농담에 나의 부족한 믿음의 민낯이 드러났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조용히 기도했다. 

‘주님, 농담인 것은 알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미국에 남겨진 어린 남매와 제 아내는 어떡합니까’?’ 

이런 나의 기도에 주님은 오히려 “가라”라는 음성을 들려주셨다. 

“가라, 가서 나의 복음을 전하라. 평양 구치소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가라!” 

그래도 주님을 믿지 못했던 나는 다시 물었다. 

“그럼, 미국에 두고 온 가족들은요?” 

“염려 말고 나를 믿으라. 모든 것을 보살필 나를 믿고 너는 가라!” 

부족한 나의 믿음을 일깨워 주시는 주님의 음성에 왈칵 눈물이 흘렀다. 

“순종하겠습니다! 주님 뜻대로 가겠습니다! 구치소가 아닌 땅끝이라도 가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주님의 음성에 순종하겠다고 다짐하자마자 내 마음엔 다시 감사와 감격 그리고 평안이 충만해졌다. 이미 북한 선교라는 두 번째 소명을 평양 봉수동에서 받았지만 이날 주님이 주신 마태복음 28장 19절의 말씀을 통해 주님께 받은 소명을 다시 한번 확신했다. 그날 주님과 34년 전 부르심에 약속한 사명을 오늘까지 은혜로 변함없이 순종하며 오늘 노후를 보내며 섬기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세례)를 베풀고” 34년 전 그때 받은 은혜가 지금도 쉬지 않고 북한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동기이자 에너지가 되었다. 나의 북한 선교는 전적인 사명감에서 시작됐다. 북한 선교가 아니더라도 당시 북미주에서 여러 지역 이민교회 개척과 다문화 다민족 교역자 교육 프로젝트 등 눈코 뜰 새 없이 많은 사역을 담당하였다. 

미국 내에서 하는 사역들은 그래도 교단에서 후원도 받고 어느 정도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었지만, 미국 외에서 하는 선교는 아무런 지원도 없이 자비량으로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북녘 그리고 중국 조선족 신학교육은 자비량으로 소위 ‘맨땅에 헤딩’ 하며 오직 주님 말씀만 따라 북한 선교를 해왔지만 33여 년이 지났음에도 북한은 아직도 복음의 문이 닫혀 있는 슬프고 안타까운 상황이다. 

나의 힘으로는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지만 34년 전 그날 봉수교회에서 주님이 주신 말씀과 사명을 따라 쉬지 않고 나의 할 일을 감당해 왔다. 미국과 북한, 탈북민들이 머무는 동북아시아까지 자원하여 없는 시간을 쪼개가며 주님의 명령을 오직 기쁨으로 섬겼다. 

그 길은 험난한 가시밭길이고 아무나 갈 수 없는 좁은 문이었지만, 기쁨과 환희가 충만한 여정이었다. 돌아보면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었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로 공산 불신의 나라, 북한과 중국, 동북 삼성을 섬길 수 있었다. 

무심히 흘러갈 수 있는 세월을 주님의 일에 사용할 수 있었음에 감사를 드린다. 어느덧 팔십 중반, 인생의 석양을 바라보는 황혼기에 접어든 나는 이미 공직 사역에서 은퇴한 후 20년째 살고 있다. 하지만 주님과 약속한 북한 사역을 쉬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기 때문에 여전히 중국과 북한에 오가며 북한의 복음화를 위한 약속을 간직하며 지키고 있다. 평양 봉수동 에서 주님이 주셨던 북한의 복음화를 위한 소명을 북한에 복음의 문이 열릴 때까지, 나의 생의 마지막 호흡이 다 하는 순간까지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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