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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牧會斷想] 목동들이 누리는 별난 행복            

[목회단상 牧會斷想] 목동들이 누리는 별난 행복            

지준호 목사(헌츠빌 은퇴, 자유기고가)

목동들이 누리는 별난 행복       

‘누가 행복한 사람일까?’ 질문하다 행복의 순간들을 헤아려 보았다. 아기가 엄마 품에서 엄마와 눈 맞추고 젖을 먹을 때,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수다 떨며 먹고 마시고 시원하게 배출할 때, 생명의 신비 가득한 숲에서 입을 한껏 벌리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뱉을 때, 밤하늘에 펼쳐진 별들의 장관에 감탄하다 시공을 초월한 상상을 하며 꿈을 품을 때, 봄 여름 가을의 변화무쌍한 숲속에서 생명의 싱그러움과 촉촉함 그리고 부드러움을 품은 아름다움을 즐길 때, 사랑하는 이들과 엎치락뒤치락 물어뜯는 시늉 하며 놀이를 할 때, 땀 흘린 대가로 성취한 열매로 가슴이 뿌듯할 때, 진리에 눈뜬 결과로 얻은 지혜를 삶에 적용하여 편리함을 누리며 존재가치를 높일 때, 간직하고 싶었던 소중하고 귀한 것을 소유했을 때, 은밀한 속마음을 나누는 친구와 같은 뜻을 품고 합력하여 보람 있는 일을 할 때, 터질 것 같은 가슴을 예술적으로 표현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얻을 때, 사랑하는 자녀들이 재롱을 부리며 자라 훌륭하게 되어 행복해할 때 등등. 행복은 숲속의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생물들처럼 널려 있다. 

이렇게 널린 다양한 행복들을 나는 얼마나 누리고 있을까? 반의반의 반의반도 누리지를 못했다. 왜일까? 행복 앞에서 새로운 욕망이 일거나 비교에서 오는 감정에 노예가 되었고, 이때 삐친 행복은 나를 떠나버렸기 때문이었다. 결국, 난 태어나서 자라는 순간순간 누려야 할 다양한 행복을 누리기는커녕 어둠에 살고 있는 것처럼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면서 행복을 좇아만 다녔다. 그리고 실패와 부정적인 것들을 만나고 이별의 아픔을 겪으며 인생은 본래 ‘고통’이라고 여기고 행복하지 않음을 팔자려니 자위하며 살았다. 

행복은 생물학적인 것과 영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생물학적 행복은 대부분 어릴 적 사랑의 품에서 먹고 마시고 소유하고, 성숙하며 말초 신경을 자극하며 누린다. 그러다 영적인 것과 지적인 것에 눈 뜬 성인이 된 후 다른 존재들과 진리와 소통하고 하나 되며 더 많고 다양한 잘 익은 행복을 누린다. 이렇듯 인간은 생물학적인 행복과 영적인 행복 모두를 누릴 수 있는 특권을 가졌다. 그러나 주어진 특권 대신 행복을 빼앗기는 위험을 그만큼 크게 하신 하나님의 공평하심이 보인다. 이때 난 ‘아하!’ 하고 무릎을 ‘탁’ 쳤다. 세상엔 우리들의 행복을 빼앗는 이리들이 있는 것과 ‘영적으로 깨어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이들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결정되고, 이 능력에 따라 ‘행복을 누리느냐? 불행을 누리느냐?’가 결정되는 것을 알고서. 

그래서 내 안에선 질투와 교만과 편견과 어설픈 지식과 욕심들이 영적인 눈을 흐리게 하고, 가정에선 남녀의 다름과 이기심이 서로를 오해케 하여 다툼이 일게 하고, 교회에선 명예와 권력을 얻어 쉽게 먹고 살 수단으로 담임 목사 자리를 탐하거나, 사욕을 채우려 간교한 수를 부리게 하고, 세상에선 이성과 돈과 명예의 욕망을 채우면 행복이 온다고 간사하게 속삭이는 이리들이 득실거린다. 이를 모르는 어둠에 있는 양들은 불신에서 오는 불안과 염려, 보고 들어 아는 것이 온전한 것 인양 착각하는 데서 온 교만과 감정에서 온 질투와 이기심 그리고 자존심과 욕심에 따라 살다 살금살금 기어 오는 이리들에게 물려가 행복뿐만 아니라 생명까지 빼앗기기 일쑤다. 

이렇게 호시탐탐 양들을 노리는 이리들이 득실거리는 캄캄한 밤, 양들을 지키는 외로운 목동들은 깊은 밤, 잠들 수 없었다. 그러다 피곤해 졸기라도 할 때면 이리들의 공격으로 할큄을 당하며 어서 속히 동트기를 기도하며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예사롭지 않은 별과 함께 온 수많은 천사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며 목동들을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빛으로 진리로 상담자로 친구로 생명의 양식으로 오시는 참 목자가 태어나셨다”라고 말씀해 주신 것이 아닐까? 

그래서 아기 예수를 찾아가 경배하는 목동들에게 “너희들이 얼마나 양들을 사랑하는지, 그래서 그들을 지키느라 잠자지 못하고 춥고 배고픔을 참고 견디는 사정을 내가 다 알아. 그리고 어서 속히 날이 밝기를 간절히 바라는 너희의 목마른 마음도 알지. 살금살금 기어 오는 이리들을 왜 만들어 놓았냐고 원망도 했지? 나도 너희와 똑같은 마음이었어. 그래서 내가 이 세상에 오는 소식을 너희들에게 가장 먼저 전하는 거야. 그러니 이후로는 내가 비추는 빛과 진리와 사랑 안에서 너희들의 외롭고 힘든 일을 가치 있는 일로 만들지 않겠니?”  

“세상에는 선악이 함께 어우러져 있거든. 그러나 악이 선이 되기도, 선이 악이 되기도 해. 그래서 ‘이것이 선이다, 이것이 악이다.’ 고정관념에 매여 선악과를 따 먹듯 하지 말고, 선은 더 좋은 선으로, 악은 선으로 만들어야 해. 그리고 개인이 가지고 있는 각기 다른 탤런트를 사용하여 가치를 높이고 끝없이 다양하게 널려진 행복을 누리게 하지 않겠니? 양들을 더 멀리 더 넓고 깊고 세미한 것들을 볼 수 있도록 하면서 말이야.” 하신 것이 아닐까? 

성탄절을 맞이하며 목동들에게 들려준 아기 예수의 사랑스러운 음성이 나에게도 들리는 듯하다. “비록 외롭고 배고프고 춥지만, 천사들이 찾아오고 아기 예수의 음성을 듣는 목동들이 누리는 별난 행복을 너도 누려야 하지 않겠니?”라고 하시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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