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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나무 아래서](40) “부활 후에 없어지지 않는 사랑의 흔적: 상처”

[무화과나무 아래서](40)  “부활 후에 없어지지 않는 사랑의 흔적: 상처”

궁인 목사(휴스턴 새누리교회)

부활 후에 없어지지 않는 사랑의 흔적: 상처

미국에서 목회하다 보니 은근히 부활하는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예수 그리스도를 좋은 사람과 희생을 아는 사람으로 믿지만 부활의 현장에서만은 주저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을 탓하고 싶지 않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도 믿지 않는 사람이 있었으니 어느 정도는 이해된다.

사실 도마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상처를 보고 싶었고 만지고 싶었다. 부활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예수님도 도마의 그런 마음을 아셨다. 그래서 요 20:27 처럼 도마가 말하기도 전에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고 한 것이다. 이 순간을 그림으로 그린 17세기 화가 카라바조의 그림을 보면, 도마의 손을 붙잡아 이끄시는 예수님의 손을 볼 수 있다. 왜 예수님은 만지도록 했을까? 도마에게 의심하지 말라고 그런 것일까? 아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을 기억하라고 그런 것이다.

딸을 시집보내거나, 아들을 군대 보내 보신 분들을 알 것이다. 자녀들이 떠난 빈방을 보면서, 혹은 자녀들이 입고 다니던 옷가지를 보면서 그 아이들을 얼마나 사랑했었는지 확인하게 된다. 특히 장정 소포가 압권이다. 군대 입대할 때 입고 갔던 옷들을 소포로 다시 집에 보내주는 것이다. 그것을 받은 어머니들은 전부 운다고 한다. 장정 소포를 받아들 때 꼭 군대 간 아들이 안기는 느낌이란다. 왜 그럴까요? 그 옷가지와 신발에 자녀들의 모습과 그들을 사랑한 흔적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에 있는 상처가 바로 우리를 사랑한 흔적이다. 우리 모두를 사랑해서 십자가에 당하신 고난을 보여주는 흔적이다. 그래서 도마에게 만지도록 요청한 것이다. “내가 너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었고, 고난을 당했다. 너를 사랑해서 그 고통을 견뎠다. 이제 그 사랑을 기억하라.” 바로 이 말이다. 만약 고난으로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있다면, 의심이 생길 때마다 십자가를 생각하고 나를 위해서 죽으신 주님을 바로 보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6).

찔리고, 상하고, 징계를 받고, 채찍을 맞는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랑이다. 만약 세상 실패와 고난 때문에 의심이 든다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분의 못 자국 난 손을 기억하라. 그때가 그분의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이고, 우리 의심이 믿음으로 굳건하게 되는 때이다.

믿음과 의심의 문제에서 한 가지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예수님은 믿는 자들은 복되다고 말씀하였다. 그것은 도마와 예수님의 마지막 대화에 나온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

예수님이 복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은 마태복음 5장의 팔복과 요한복음 20장뿐이다. 우리는 팔복만 기억하고 있지만, 아홉 번째 복이 있다. 그것은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복이다. 이 ‘복’은 헬라어의 ‘마카리오스’로 ‘행복하다’는 의미인데, 천국에서의 행복보다 이 땅에서의 행복을 더 강조하는 것이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이 땅에서도 행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누굴까? 힌트는 31절에 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렇다.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믿는 사람이다. 말씀의 능력으로 믿음을 갖는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2000년 전 예수님을 직접 만난 적이 없는 사람 아닌가! 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믿고 행하는 사람 아닌가! 이 복을 누릴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난 앞에서도 주님의 부활의 흔적을 생각하라. 그것을 바라보라. 그때 우리 믿음은 더욱 굳건해질 것이다.

많은 기독교 서적을 저술한 필립 얀시(Philip Yancey)는 “비참한 세상에서 하나님이 무슨 소용입니까? 우리가 고통당할 때 당신은 어디 계셨습니까?”라는 질문의 해답을 찾기 위해서 노력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진 그 순간, 필립 얀시는 한 사건을 기억하게 된다.

그는 2007년 2월, 교통사고로 척추 뼈가 골절되는 사고를 당했다. 의사는 부러진 척추 뼈가 동맥을 찌르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다며 가족과의 마지막 통화를 권했다. 정말 안 좋은 상황이었다. 죽음이 그에게 엄청난 고통과 함께 밀려왔다. 고통과 두려움을 마주한 얀시에게 의사는 어떤 약도 주지 않았다. 하다못해 진통제조차 주지 않았다.

오히려 사지를 꼬집고 핀으로 찌르며 “아픕니까? 느껴집니까?”라고 묻기만 했다. 그가 “예!” “예!”라고 답하면, “좋아요!” “아주 좋아요!”라고만 했다. 그런데 아픈 감각은 신경이 손상되지 않았다는 증거고, 의식이 있다는 증거였다. 그렇다. 고통은 몸이 성하다는 생명의 징후였던 것이다.

만약 삶에서 고통이 느껴진다면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의심이 생긴다면 내가 믿고 싶다는 증거다. 환경과 미래를 두려워하지 말고 새로운 부활의 소망을 가지라. 다시 극복하라. 보이는 것을 의심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신뢰하라! 그때 부활의 신앙을 가지게 된다. 눈에 보이는 현실은 우리를 두렵게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지금도 일하신다.

이번 부활절은 주님의 사랑의 흔적을 기억하는 하루가 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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