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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광 목사의 문학의 숲에서 만나는 진리의 오솔길] 기독교 문학 산책 – C. S. 루이스의 생애 산책(12)

[강태광 목사의 문학의 숲에서 만나는 진리의 오솔길]  기독교 문학 산책 – C. S. 루이스의 생애 산책(12)

강태광 목사(World Share USA대표)

C. S. 루이스 삶과 사상 산책 (12) 

루이스의 아버지 앨버트 루이스

C. S. 루이스 아버지 앨버트 제임스 루이스(Albert James Lewis)는 아일랜드 남부에 있는 코크 카운티의 코크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리처드 루이스는 1850년대 초에 아내와 함께 코크로 이주한 웨일스 출신의 보일러 제조업자였다. 리처드 루이스는 앨버트 루이스가 어릴 때 북부의 공업도시 벨파스트 지역으로 이주했다.

리처드 루이스는 벨파스트지역에서 존 H. 메킬웨인과 손을 잡고 기계제조 및 철선 건조업체인 ‘메킬웨인 & 루이스’를 세워 운영하고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알라스터 맥그라스는 <별난 천재, 마지못해 나선 예언자 C. S. Lewis>에서 작은 회사 ‘메킬웨인 & 루이스’가 1888년에 최초의 타이타닉을 제조했다고 소개한다.

리처드 루이스가 운영했던 조선(造船)회사가 있었던 벨파스트(Belfast)는 당시 번창하는 상업 도시였고, 세계 최대 조선소가 있었다. 이런 대형 조선소들이 즐비한 가운데 소형 조선소가 살아남기는 쉽지 않았다. 메킬웨인 & 루이스는 1894년에 대형 조선소인 워크맨 클라크에 합병되었다.

앨버트 루이스는 아버지가 하는 조선업에 관심이 없었고 법률가가 되고 싶다는 뜻을 아버지에게 밝혔다. 리처드 루이스는 아들 앨버트 루이스를 윌리엄 톰슨 커크패트릭(훗날 C. S. 루이스의 스승이 된다)이 교장으로 있었던 러건 칼리지로 보냈다. 당시 이 학교는 진학률이 아주 좋은 학교였다.

앨버트 루이스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그는 루이스 집안에서 처음으로 전문직으로 진출한 사람이었다. 그는 여러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다가 1884년 벨파스트로 돌아와 법률 사무소를 열고 변호사 활동을 했다. 당시 아일랜드 법조계는 변호사를 두 종류로 구분했는데, 앨버트 루이스는 ‘법정 변호사(Barristers)’ 대신 ‘행정 변호사(Solicitors)’로 일했다.

행정 변호사는 의뢰인을 대행하여 문서를 작성하고 하급 법원에서 변론하기도 했다. 의뢰인을 대변하는 행정 변호사가 법정 변론을 전문으로 하는 법정 변호사를 고용했다. 앨버트 루이스는 상당히 성공적인 변호사였고 문학적 소양이 상당한 변호사로 잘 알려졌다. 앨버트 루이스가 법정에서 변론할 때 문학 작품을 인용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앨버트 루이스는 책을 많이 읽는 박식한 사람이었다. 당시 어느 신문은 앨버트 루이스를 설명하면서 법정 밖에서는 책을 읽는 것이 주된 소일거리라고 소개한 적이 있다고 한다.

앨버트 루이스는 문학과 책을 사랑하는 자신의 성향 때문에, 한편으로는 두 아들의 교육 때문에 집을 책들로 가득 채웠다. 앨버트 루이스는 아들들을 잉글랜드 기숙학교에 보내서 영국식 교육을 받게 하는 것이 자녀들 장래에 유익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C. S. 루이스의 형 워런 루이스(Warren Lewis)는 어머니가 죽기 전에 기숙학교에 입학했고, 둘째 C. S. 루이스는 어머니가 죽은 후 기숙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앨버트 루이스는 아내가 복부암 판정을 받은 후부터 아내를 간호할 간호사를 집에 머물게 했다. 잉글랜드에서 학교에 다니던 큰아들을 불렀고, 아내와 두 아들이 함께할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앨버트 루이스의 마흔다섯 번째 생일에 아내가 죽었다. 그녀가 죽은 날의 달력이 앨버트 루이스의 남은 평생 그의 방에 그대로 달려 있었던 것을 나중에 그의 큰아들이 알게 되었다. 그만큼 아내의 죽음은 앨버트 루이스의 삶에 큰 충격이었다.

앨버트 루이스의 아내 플로렌스의 죽음은 그들의 두 아들에게도 큰 충격이었지만, 앨버트 루이스는 평생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다. 그 후 앨버트 루이스는 두 아들과 정서적 교류에서 상당히 어려웠다. 하지만 그는 두 아들의 교육에 온 정성을 기울였다. 워런(Warren) 루이스와 C. S. 루이스를 자신의 스승이었던 커크패트릭 지도를 받게 한 것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앨버트 루이스는 둘째 아들이 공부를 마쳤지만 취직하지 못하자 경제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기에 서툴렀다. 전쟁에서 부상당한 아들(C.S.루이스)이 병원에 위문하러 와 달라는 강력한 요청에 부응하지 못했다. C. S. 루이스는 부상을 당해 장교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아버지에게 긴 편지로 찾아와 달라고 간청했었다. 하지만 앨버트 루이스는 끝내 아들의 병원에 가지 않았고 이것이 부자간을 멀어지게 하는 큰 사건이 되었다.

아버지를 대신하여 친구 어머니 무어 부인이 C. S. 루이스를 돌봐 주었다. C. S. 루이스는 친구와 맺은 맹세를 굳게 지키기 위해 자신을 돌봐 준 친구의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그녀를 보양했다. 훗날 1927년 앨버트 루이스가 아들에게 잉글랜드를 여행할 계획을 밝히며 옥스퍼드에서 루이스와 그의 칼리지 숙소 방문을 원한다는 편지를 보냈는데 C. S. 루이스는 아버지 방문을 거절했다.

C. S. 루이스는 아버지가 죽음을 앞두고 찾아와 주기를 요청했지만, 아버지에게 가지 않았다. 이렇게 아버지를 사랑하지 못한 것이 C. S.루이스의 평생 부담과 마음의 짐이 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루이스는 <용서>라는 글에서 자신이 용서받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힌다.

C. S. 루이스의 생애에 아버지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하다. 특별히 아들 C. S. 루이스가 인문학적인 소양을 갖춘 학자로 성장하는데 아버지 앨버트 루이스는 엄청난 영향을 보여주었다. 아이들을 위해 집을 책으로 가득 채운 것이나 자신의 옛 스승 윌리암 커크패트릭에게 아들을 맡겨 고전어와 논리 그리고 유럽어를 익히게 한 것은 인문학자 C. S. 루이스를 키우는 과정이었다.

앨버트 루이스와 C. S. 루이스 부자(父子)는 사랑 표현에 서툴렀다. 특히 아버지 앨버트는 아내를 잃은 후 삶의 균형을 잃었고 이런 아버지를 아들 C. S. 루이스는 이해하지 못했다. 어쩌면 우리 주변에서 흔한 모습이다. 서툴고 투박한 부자간의 사랑으로 C. S. 루이스는 아버지와 좋은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고, 아버지에게 못되게 굴었다. 그리고 이것이 C. S. 루이스에게 씻지 못할 큰 상처와 죄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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