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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牧會斷想] 몇 인칭의 예수가 내 안에 계실까?

[목회단상 牧會斷想] 몇 인칭의 예수가 내 안에 계실까?
지준호 목사(헌츠빌 은퇴, 자유기고가)

몇 인칭의 예수가 내 안에 계실까?

나에겐 만날 때마다 실눈을 가늘게 뜨고 흠잡을 거리를 찾는 동네 형 한 명이 있다. 식당에서 음료수를 빨대로 마시면 미운 놈의 못된 흠결이라도 찾아낸 듯 빈정거린다.

“환경오염의 주범이 되면  어떻게 해, 목사가.” 

즐겁게 골프를 치다가도 시비를 건다.

“카트 도로로 다녀야지 잔디로 다니면 어떻게 해. 목사가.” 

난 거미줄에 걸린 잠자리처럼 몇 번 허우적거리다 더 이상 꼬투리 잡힐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교회와 목사들의 낯 뜨거운 소문과 민망한 기독교 역사를 들추며 불신앙의 쾌감을 즐긴다. 그런데도 밉지를 않다. 오히려 심술궂게 질문거리를 찾아내는 그가 귀엽다.  게다가 책을 많이 읽어 어떤 주제의 이야기를 꺼내도 막힘이 없다. 그리고 좋은 일에는 항상 불러주는 사랑에 난 그와 스스럼없는 사이가 되었다.
그런 그가 여행을 다니다 영상 하나를 보냈다.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파인만 교수의 “신은 정말 존재하는가? 믿기 힘든 설명”이라는 제목이었다. 내 메일에 영상을 올려놓고 보내기 버튼을 꾸 -욱 누르며 승리감에 취한 미소가 떠올랐다. 꼼꼼히 보았다. 1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코를 납작하게 할 꼬투리가 보였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끝까지 보고 또 보았다. 반격할 기회를 주지 않아야 하니까……

흥분된 채 컴퓨터 자판을 두들겼다.

형. 파인만의 영상 잘 보았어. 역시 노벨 수상자 답게 빈틈없는 논리로 비판을 똑 부러지게 잘했네. 이름을 안다는 것과 진짜로 안다는 것이 다르다는 내용은 내 마음을 사로잡았어. 난 예수를 얼마나 어떻게 알고 있는지 점검하는 시간이 되었어. 그리고 과학도 신앙도 모른다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말에는 박수를 쳤어. 모르는 데서 점점 많이 알아가는 것이 성숙이라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나는 어땠나 생각하니 부끄러운 마음이 드는 거 있지. 그리고 기도가 물리를 거스르는 듯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방학을 맞아 함께 지내고 있는 친손주와 외손주 네 녀석이 떠올랐어.

그들이 이 영상을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호기심이 일었어. 한편으로는 호감을 가지고, 한편으로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 것이라 생각하며 짜릿함을 느꼈어.

뉴저지에서 온 친손녀 둘이 캘리포니아에 살고 외손주에게로 와 함께 신나게 지내고 있어. 그런데 기특하게도 매일 저녁 잠들기 전, 삶의 모든 것을 나누는 거야. 어려웠던 일, 좋았던 일, 고민되는 일, 남 모르는 호기심, 부끄러운 일까지 한 사람 한 사람 털어놓으며. 그리고 서로 조언하고 의견을 나누고 기도를 해 주는 거 있지. 지금 처한 어려움과 고통을 아름다운 서사를 만들 수 있도록 인내와 용기와 지혜를 구하며.

그들 안에는 1, 2, 3인칭으로 계시는 예수가 상담자, 진리, 사랑, 빛 등 다양한 모습으로 개입하고 있는 것이 보였어. 필요에 따라 치료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꿈과 용기를 주시며. 물론 그들의 고모고 엄마인 딸이 리드는 하고 있지만 예수의 품에만 안주하는 것이 아니고 인격 대 인격의 만남을 하고 있었어. 그렇게 기도하는데 어떻게 범사에 감사하는 기도가 나오지 않겠어. 세상을 당연히 긍정적으로 보게 되는 것이고.

그들에게 예수님은 2인칭과 3인칭으로만 여기고 있는 분이 아닌 그 이상이었어. 난 예수와 신앙인의 관계를 분류해 봤어. 사람들이 말해주고, 역사와 성경 속에서 이야기하는 3인칭의 예수를 믿는 사람들. 내가 “주님” 혹은 “당신”이라고 부르며 2인칭인 예수와 관계를 맺고 사는 신앙인들. 자신은 아니지만 안에서 1인칭처럼 예수의 마음과 진리가 내 생각과 선택을 좌지우지하는 신앙인들.

예수님을 역사 속에 계셨던 ‘그분’으로만 아는 것과, ‘당신’이라고 부르며 대화하는 것과 내 안에서 나의 주체가 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 아니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기만 하는 신앙에서 벗어나, 그분과 함께 생각하고 질문하고 선택하는 신앙을 일깨워 준 참 좋은 강의였어. 2-3인칭의 이름만 아는 예수를 믿는 신앙인이라면 파인만 교수가 주장하는 말에 고개를 끄떡이며 신앙에 회의를 가지게 될 수밖에 없었을 거야. ‘사랑의 하나님이 계시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기느냐’ 불평하면서.


“목사가 어떻게 그래?”
“교회가 왜 그래?”
“신앙인이 그러면 되나.” 

거미줄을 치던 형이 세련된 덫을 놓고 내가 예수를 몇 인칭으로 믿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자신도 1인칭의 예수를 믿고 싶어서였다는 생각에 난 무릎을 탁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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