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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牧會斷想] 뻥튀기

[목회단상 牧會斷想] 뻥튀기

지준호 목사(헌츠빌 은퇴, 자유기고가)

“뻥튀기”

생존 욕구를 시작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와 이기적인 오만가지 욕심에 따를 때면 사랑과 도덕, 진리가 제동을 걸곤 했다. 결국 난 이 둘 사이에서 갈등하다 적당히 가면을 쓰고 눈치껏 체면치레하며 살았다. 그렇게 사는 나에게 다윗은 “정직한 자는 여호와의 얼굴을 뵈오리로다”라고 고백하고,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시며 찜찜한 부담을 주었다. 질문이 생겼다. 어떻게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일까? 과연 정직하게, 마음이 청결하게 이 세상을 살 수 있을까? 아리송한 의문을 품고 지내던 나에게 하나의 아린 옛 추억이 떠올랐다.

다섯 명의 아들을 일제 식민 치하와 6·25 동란 가운데서 잃고, 애증 속에서 생존한 딸에게서 얻은 외손자를 아들처럼 사랑하는 외할머니가 사시는 평창에서의 일이다. 이곳엔 하얀 물거품을 반짝거리며 쏜살같이 빠르게 흐르는 강물이 마치 봄을 맞은 어린이들이 서로를 부르고 웃고 외치는 것처럼 소리를 내며 수수만년을 백덕산 밑자락을 치고 깎아 깊게 파인 소(沼) 하나가 있다. 그곳엔 알쏭달쏭한 전설을 간직한 아름답고 신비한 생명체들이 검푸른 깊은 물 속에서 서로 생명 고리의 관계를 맺고 희로애락 가운데 산다.

방학을 맞아 외할머니에게 간 나는 이모부를 따라 토요일이면 강물이 소(沼)를 파며 만든 모래 언덕에서 낚시하곤 했다. 이모부는 낚싯대에 매달린 딸랑이가 울리기를 기다리고, 나는 강변 모래밭에 잡힌 고기들이 머무를 작은 연못을 만들고 있을 때였다. “잡았다.” 이모부가 큰 소리를 외치시고는 허리를 뒤로 재치고 낚싯줄을 힘차게 서둘러 감고 있었다. 난 용수철 튀어 오르듯 벌떡 일어나 낚싯줄 끝에서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버둥거리며 끌려오는 흰색 바탕의 무지개색 물고기를 보곤 “와~ 아” 환호를 지르며 펄쩍펄쩍 뛰었다. 내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들어주는 이모부는 “봤지!” 하시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턱을 들어 올리며 나를 바라보셨다.

이렇게 잡힌 메기, 모래무지, 매자, 꺽지, 쏘가리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고기들이 한 마리 두 마리 소꿉 연못에 던져지면 더러는 배를 보이게 드러눕기도, 더러는 서둘러 모래 속에 숨기도, 더러는 펄쩍펄쩍 뛰어 연못을 튀어나와 온몸이 모래에 싸여 잠잠해지기도 했다. 그러면 난 그를 다시 모래를 털고 연못 속으로 넣어주곤 생존하는 신비로움을 보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러다 해 질 녘 이들을 그릇에 담아 부자가 된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오고 있을 때였다.

뿌듯함과 행복감에 취해 걷고 있는 나에게 이모부가 질문했다. “학교에 다녀오면 무얼 해?” 나는 “음….”하며 생각하다가 “토끼를 길러요. 학교에서 돌아오면 토끼에게 풀을 뜯어다 줘요. 때로는 토끼장 청소도 해 주고, 물도 주고….”

“토끼를 길러?”

“네”

“힘들지 않아?”

“힘들기는요, 얼마나 재미나는 일인데요. 새끼도 낳게 하고 그 새끼들도 길러요.”

“그래? 대단하구나.”

“토끼들은 내가 아빠인 줄 알 거예요. 내가 토끼장 앞에 가면 토끼들이 뒷발을 탕탕탕 구르며 반가워해요. 그러다 이리 뛰고 저리 뛰어요. 토끼들이 내 얼굴을 알아요. 이런 토끼들에게 맛있는 풀을 넣어 주면 “삭삭삭” 소리를 내며 갉아먹는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요. 보람도 있고….”

“그래? 그렇게 기르는 토끼가 몇 마리야?” 하고 이모부가 물으셨다. 이때 난 “10마리요.” 우쭐하며 대답했다. 이때 이모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10마리나 돼? 물으셨을 때 아차스럽게 높은 낭떠러지에서 툭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내 마음에선 “아니잖아!”하는 소리가 들렸다. “2마리를 10마리라고 뻥튀기하면 어떻게 해.”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하듯 속상해하면서….

순간 신비하고 아름다운 자연과 어우러진 가운데 고기 잡는 행복도 이모부에게 사랑받는 행복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세상을 다 주어도 바꾸지 않을 귀여운 아들처럼 여기는 외할머니가 기다리시는 집으로 돌아왔지만, 예전과 다르게 저녁을 먹고 가족들이 즐겁게 수다를 떠는 동안 난 잠잠하게 보냈다.

가면을 쓰게 된 난 외갓집에서 한 달의 방학을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학교를 다녀온 어느 날이었다. 이모부께서 집에 와 계셨다. 그런데 하필 이모부가 토끼장 앞에 서 계셨다. 나는 머리에 쥐가 나고 세상이 노랗게 변했다. 이모부가 한 마리 두 마리 토끼를 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2마리를 10마리로 뻥튀기한 순간보다 몇 배로 온몸의 기운이 쏙 빠져 버렸다. 그리고 확신이 들었다. 이모부는 나를 “거짓말쟁이”라며 속으로 확신하고 있을 거라고….

이모부에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오셨어요” 고개 숙여 인사를 겨우 한 난 “숙제를 해야 해서 내 방으로 가겠다”라고 어렵사리 말하고 그 자리를 피했다. 잡힌 물고기가 모래 속으로 숨는 것처럼…. 그러나 방안에 머무르는 시간은 모래가 온몸에 묻어 꼼짝하지 못하는 작은 연못에서 튀어나온 물고기 같은 신세가 되었다. 저녁 시간이 되어 태연한 척 방에서 나와 가족들과 함께 식사하며 이모부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하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가슴앓이를 하며 밤을 지새우고 아침 일찍 학교를 가며, 낚시에 걸렸다가 내가 만든 작은 연못에 던져진 물고기처럼 눈곱만한 자유를 맛보았다.

하지만 이후론 방학이 되어도 눈 빠지게 기다리시는 사랑하는 외할머니가 계시는 평창에 가기가 싫었다. 그리고 문득문득 뻥튀기한 토끼 생각이 날 때면 우울해졌다. 이모부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뻥튀기했다”라고 고백했더라면…. 그러면 “누구든 그럴 때가 있지. 그런데 넌 정직하게 잘못을 고백하는 것을 보니 멋진 사람이구나. 훌륭하게 될 거야.” 그리고 “이렇게 고백하는 네가 더 자랑스럽다”는 칭찬을 들으며 더 깊은 사랑을 받는 내가 되었을 텐데… 후회하다 “너 같은 게 뭐…. 그냥 적당히 공부해서 먹고 살아”라며 존재의 꿈을 스스로 시시하게 만들고 있는 나 자신을 보았다.

정직하게 사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정직을 조절하며 상대해야 할 각기 다른 존재들이 보였다. 첫째는 온전하게 정직하게 상대할 내 안에 계시는 주님, 둘째는 비록 온전할 수는 없어도 생물학적인 나까지 드러낼 수 있는 부부, 그다음으로 정직해지기 쉬운 부모와 자녀, 그다음은 친구, 그다음은 이렇게 저렇게 만난 사람들…. 결국 온전한 정직으로 상대할 분은 하나님이고, 이 교제에서 나온 진리의 깨달음과 창의력, 상상력을 정직의 수위를 조절하며 인간관계를 할 때, 나의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이 보인다. 그리고 정직의 수위를 인간들에게 높일수록 생명이 봄을 맞이한 식물들처럼 새싹을 틔우 듯 생기 있는 삶이 되어 존재의 가치가 높아지고 행복을 더 크게 누리는 진리를 가슴에 품고 봄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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