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사역했지만, 이런 자리는 처음이었습니다”
미주침례신문사, 북방선교포럼 성료
강사로는 한국서 31년, 북한·중국 16년 사역한 리&노마 니콜스 부부
리&노마 니콜스, 한국의 교회개척기금 기초 놓고, 침신대와 평양과기대 설립에 공헌
※ 이 기사는 보안의 이유로, 되도록 ‘선교’ ‘선교사’의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자 주>
미주침례신문사(이사장 임경철 목사)는 지난 부활주일 다음 날인 4월 5일(월)에 오전 11시 ~ 오후 3시까지의 일정으로 세광선교센터(1795 Buford Hwy. #B, Duluth, GA 30097)에서 “선교사의 눈으로 보는 북·중 선교와 한·중/미·중 관계”라는 주제로 북방선교포럼을 개최했다. 이날 초청된 강사는 한국에서 31년을 헌신하고, 중국에서 16년 동안 머물면서 북한을 다니며 평양과기대의 설립을 도왔던 리&노마 니콜스 교수 부부였다.
편집부장으로 섬기고 있는 채공명 목사의 찬양 인도로 박윤아 행정실장의 반주에 맞춰 다함께 찬양을 부른 뒤 미주침례신문사의 총무이사로 섬기고 있는 임연수 목사(생명나무침례, GA)가 대표기도했다. 임연수 목사는 기도하기 전에 북한과 중국의 영혼을 위해서 오래 전에 뿌려졌던 복음의 씨앗이 잠시 기도하는 기도회를 이끌기도 했다.
채공명 목사의 사회로 진행된 포럼은 간단한 환영 인사 후 이사장 임경철 목사(세광, 원로)가 나와 강사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임경철 목사는 “반갑고 감사하다. 1967년에 리 니콜스 내외가 한국에 왔다. 한국 이름으로는 이환익, 이난희다. 연세대에서 어학연수를 하며 제가 목회한 영등포교회에서 2년간 출석했다. 니콜스는 저와 심방도 하며 한국을 위해서 많은 진로를 놓고 대화 나누다가 신학교 교수도 할 수 있지만, 전도하는 선교사가 되면 좋겠다고 해서 침례교회가 5개 밖에 없는 전라도로 내려가게 됐다. 전남과 제주도를 상대로 선교를 하다가 전라북도까지 책임지고 지역 사역했다”며 “다 말할 수 없지만, 이분들에 대해 꼭 알아야 할 것은 한국의 기독교한국침례회에 국내선교부가 있는데 처음 시작될 때는 대여보존위원회였다. 미국에서 선교사들이 선교비를 받아서 사용하다가 대여보존위원회를 만들어서 대여할 교회는 대여해주고, 그냥 줄 교회는 그냥 주기로 규약을 만들어서 처음에 시작했다. 몇몇은 반대했지만, 니콜스와 함께 연구하며 강력히 진행했다. 미국이 언젠가는 손을 뗄 텐데 한국에 돈을 빨리 갖다가 빨리 자립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었고, 니콜스는 한국교회의 자립에 목적이 있었다. 이렇게 해서 대여보존위원회가 기금위원회로, 기금위원회가 지금 국내선교부가 됐는데 현재는 얼마나 돈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전에 들으니 100억은 된다고 했다. 그때 이 기금위원회를 처음 만들어서 한국 사람 둘, 미국 사람 둘이 위원회가 됐는데 한국은 나하고 정인도 목사, 미국 측은 샘 초이하고 오스카 보스맨이 위원이었다. 이걸 처음 만들어서 첫 번째 총무를 세웠고, 미국에서 오는 돈이 다 그쪽으로 들어갔는데 그 총무가 리 니콜스였다. 그때 나는 홍콩과 일본의 예를 들어서 그 일을 시작했는데, 지금 한국 침례교총회는 그것 때문에 교회 발전에 힘이 많이 되고 있다. 그 후에 이분이 이리에 와서 기도하며 헬라어를 가르치다가 대전 신학교에서 헬라어를 가르쳤다”고 리 니콜스를 소개했다.
계속해서 임 목사는 “리 니콜스가 이렇게 큰 공헌을 했는데, 노르마는 더하다. 목동 신학교가 중동에서 시작했다가 목동으로 이사했다가 지금 유성으로 이사했는데, 허긴 총장이 유성 신학교를 건축할 때 계약을 하고 중도금을 치르지 못해서 해약 위기에 있었다. 난 몰랐는데, 허긴 총장이 임연수 목사 교회에 왔다가 자기가 평생 노르마를 잊지 못한다고 했다. 노르마 선교사가 한국침례교선교회의 사무국장이어서 허긴 총장이 그 문제를 의논했고, 노르마가 ‘OK, I can help you’라고 말하고 이백만 불을 자기가 사인해서 빌려주었다. 그 이백만 불로 지금의 유성신학교를 무난히 건축하게 됐다. 그후 난 미국을 왔지만, 이분은 한국을 31년 선교하고 중국에 가서 연길과학기술대학에서 리 니콜스와 노르마가 외국어학원원장을 하다가 귀국했는데 미국 정부에서 북한을 돕는 식품, 약품 등을 큰 컨테이너로 실어갈 때가 있었다. 뉴욕에서 정식으로 시험을 쳐서 뽑혀서 민간인으로 북한에 들어갔다. 북한에 들어가서 물품을 나눠주는 기록과 감독을 했다. 그러다가 미국을 왔는데 리 니콜스는 비자를 주지 않고, 노르마만 북한 비자를 받아서 들어가고, 리 니콜스는 어학원을 계속하다가 나중에 들어갔다. 그래서 평양과기대 건축 때부터 노르마가 영어교육 커리큘럼을 작성한 사람이다. 평양과기대에서 7년 동안 봉사했다. 나이가 많아 미남침례교의 정책에 맞지 않아서 지원이 중단됐음에도 불구하고 셀프서포트로 사역했다. 노르마는 여기서도 지금은 상황이 이래서 북한에 들어갈 수 없지만,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간단히 소개했지만, 첫째 선교에 소명이 있는 분들이고 전략가들이다. 그래서 대여보조위원회를 의논해서 시작한 것이 지금 한국 침례교의 최고 단체가 되지 않았나. 그리고 선교의 실천가들이다.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헌신하는 사람들이다. 우리 집에 따뜻한 물도 안 나오고, 샤워 시설도 없었는데 우리 집에 와서 자기도 했는데 나보다 한 살 위인 리 니콜스를 몇 해 전에 봤을 때 건강했는데, 많이 늙어서 눈물이 났다. 제 생애의 선교 정신에 영향을 준 훌륭한 선교사이다. 여러분과 함께 주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환영하며 이렇게 소개한다”며 부부와의 추억과 공적을 전했다.
▲ 리 니콜스
소개를 받아 단에 선 리 니콜스 교수는 아직 한국말이 유창하지는 않았어도 충분히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훌륭했다. 연령과 한국을 떠난 기간 등을 고려해볼 때 아직도 한국말로 강의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언어를 구사하는 것에 참석자들은 모두 감탄했다.
리 니콜스 교수는 “잘 소개해주셔서 감사하다. (임) 목사님이 나를 많이 도와주었다. 그리고 한국 목회자들이 나를 많이 도와주었다. 어떤 때는 좀 애를 먹었지만, 서로 사랑했다. 목사님 감사하다. 한국에 있었을 때 1969년부터 90년까지 한국 침례교회의 부흥이었다. 67년에 연세대에 가서 한국말 공부하면서 죽을뻔했다. 솔직히 말씀하면 사실은 15년 동안 전도도 못하고, 좋은 말도 못하고 그래도 계속해서 공부했다. 한국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서 더 잘 배웠다. 전도할 수 있게 되고, 상담도 할 수 있게 됐다. 한국 목회자들에게 큰 감사를 드린다”라며 기억을 술회했고 “처음에 지방회 협동사역으로 제일 큰일을 했다. 전북지방에서 27년 일할 때 7년은 전남지방회와도 같이 일했다. 그리고 같은 기간에 임경철 목사의 부탁을 받아 대전에 살면서 서울 한남지방회도 1년을 함께 동역했다. 이후 아내가 사무총장이 돼 인천지방회에서 2년 동안 일했다. 한국에 머문 것은 31년, 사역은 29년이었고 기금위원회에서는 12년 동안 일했다. 그때도 애를 많이 먹었다. 돈 관계 참 힘들다. 한 20교회 도울 수 있었는데 50교회가 신청해서 힘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성공했다. 경험을 많이 가진 장로교 선교사한테도 가르쳐달라고 했는데… ‘안 된다’고, ‘한국 사람은 갚지 않는다’고 했지만 우리는 시작했다. 12년 동안 총무로 일해왔는데 김인봉 목사, 윤일현 목사, 백철기 목사한테 큰 도움을 받았다. 나 때문에 그들이 애를 많이 먹었지만, 기금위원회가 바로 결정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라며 한국에서의 사역을 소개했다.
리 니콜스는 지방회, 한미기금위원회, 헬라어 교수(침신대)로 활동하던 시절의 에피소드들을 재밌게 풀어 놓으며 특히 27명의 학생에게 헬라어를 가르쳤는데 페트라로 유명한 김선기 목사, 침신대에서 가르치는 김광수 교수가 그 27명의 학생 중에 있었다며 술회했다.
▲ 노마 니콜스
노마 니콜스는 1999~2015년 남편과 함께 중국에 머물며 2009~2015년 북한에 들어가 한 번에 4~6개월 체류하며 2010년에 개교한 평양과기대의 설립을 도왔다. 북한에 들어가기 전에는 IMB를 은퇴해 일반인의 신분이 돼 자유롭게 북한에서 일할 수 있었다.
단에 오른 노르마 니콜스는 “쉽게 얘기하겠다. 하나님이 인도하지 않았으면 할 수 없었다. 우리 비슷한 일 하는 사람들이 전 세계적으로 있고, 어떤 때 아주 어렵다. 기도 제목에도 없는 이들이 많지만, 하나님이 그들의 이름을 아시니 기도해야 한다. 나는 원래 의사가 되기 위해서 아주 열심히 공부했고, 나중에는 의료선교사가 돼야겠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의료보다 하나님의 마음이 더 중요하게 돼 선교만 생각하게 됐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이루신다. 또 원래 인도네시아로 가려고 했었는데 선교부에서 대학에서 친구를 통해 한국에 대해서 많이 얘기하고, 신학교에서 단 존스 선교사님이 한국에 와 달라고 하며 5년 동안 전도하는 선교사가 없었다고 필요하다고 했다. 우리가 한국으로 가려고 했을 때 너무 어려운 곳이라고 사람들이 말했다. 우리는 한국으로 도착해 하나님께서 인도하는 대로 일했다. 그러다가 북조선에 가서 5개월 동안 북한에서 여기저기 다닐 수 있었다. 그전에는 미국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었고, 아주 특별한 것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앞으로 미국 사람 다시 갈 수 있을 것이다. 평양과기대학교 잘 가지 못하지만, 그전처럼 학생이 많지는 않지만, 아직 있다. 그 일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라며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다며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했다.
미주침례신문사가 준비한 점심을 먹고, 오후 세션에서도 리 & 노마 니콜스 부부는 한국과 북한에서 있었던 하나님의 은혜를 나눴다. 이날은 특히 연변과기대와 평양과기대에서 같이 일했던 장 윤삼, 장현순 교수가 참석했는데, 장윤삼 교수가 나와 학교에서 경험했던 에피소드를 전하며 은혜를 나눴다.
오후 세션을 가진 뒤에는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고, 리 & 노마 니콜스 부부와 그들이 뿌린 씨앗을 위해서 다함께 통성으로 기도한 뒤 미주침례신문사 이사로 섬기는 최기철 목사(세광침례, GA)가 폐회기도로 모든 포럼의 순서를 마쳤다. 미주침례신문사는 참석자들을 위해 침례표기 성경을 선물로 증정하기도 했다.
리 & 노마 니콜스 부부는 평생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특별히 한국을 섬겨왔는데 이렇게 시간을 따로 마련해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준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며 연신 감사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이날 참석자 중에는 멀리 루이지애나에서부터 애틀랜타까지 달려온 소재훈 목사와 권영숙 사모(Mid South Global Mission)가 있었다. 권영숙 사모는 자신들의 젊음을 한국에 다 부어준 노고에 감사하다며 포럼 후 리 & 노마 니콜스 부부를 안아주어 큰 감동을 주었다. 몇몇 참석자들은 “포럼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들의 섬김 때문에 우리가 있는 것이고, 내가 어렸을 때 저분들이 우리 교회에 오셨던 기억이 난다. 이런 자리를 마련해서 저분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여주고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큰 감사의 표현과 격려가 됐을 것이다”라며 이번 포럼의 의의를 말하기도 했다. 실제로 리&노마 니콜스 부부는 “평생 사역했지만, 이렇게 자리를 마련해서 우리의 얘기에 귀 기울여준 자리는 처음이었습니다”라며 계속해서 주최 측과 참석자들에게 감사를 표현했다.
한편, 이날 포럼을 위해 많은 섬김이 있었는데 특별히 임경철 목사의 가족은 리&노마 니콜스 부부와 특별한 친분을 기억하며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임경철 목사의 딸 에스더는 그동안 침례신문사의 설립 때부터 많은 후원을 해왔는데, 이날도 멀리서 직접 운전해서 온 리&노마 니콜스 부부에게 주유카드를 후원했고, 장남 임헌우 목사는 저녁식사를 대접했으며 메리 & 월레스 부부는 포럼 진행에 스태프로서 신문사 박윤아 행정실장과 함께 뛰어주었다. 또한 총무이사 임연수 목사는 첫날 저녁식사 대접과 모든 진행을 위해 관심과 수고를 아끼지 않는 등 많은 이들의 섬김과 수고로 이날 행사는 은혜 가운데 마칠 수 있었다.
당초 이번 행사는 코로나로 인해 15명으로 인원을 제한하고자 했으나 리&노마 니콜스 부부를 만나기 위해 원근 각지에서 25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참석한 권영숙 사모가 한국을 위해 젊음을 다 바친 노마 니콜스를 안아주고 있다. 임경철 목사 가족은 니콜스 부부를 특별한 우정과 사랑으로 섬겼다.
/ 미주=채공명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