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광 목사의 문학의 숲에서 만나는 진리의 오솔길] 기독교 문학 산책 – C. S. 루이스의 생애 산책(8)
강태광 목사(World Share USA대표)
C. S. 루이스 삶과 사상 산책 (8)
루이스에게 영향을 준 작가 G. K. 체스터턴
C. S. 루이스가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신앙 변증가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루이스는 다양한 저술 활동을 통해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기독교 신앙을 변증했다. 그는 지금도 많은 신앙인에게 선한 영향을 주는 베스트 셀러 작가다. 이런 루이스가 신앙인과 저술가로 성장하는 과정에 G. K. 체스터턴(Gilbert Keith Chesterton)의 영향을 받은 것은 주목해야 할 사실이다. 루이스는 부상 병동에서 체스터턴 글을 읽고 영적인 여행을 시작했다.
지난 20세기에 영국은 걸출한 기독교 변증가를 배출했다. 20C 후반은 세계 복음주의 운동(Evangelical Movement)을 이끈 존 스토트(Stott)가 활동했다. 중반에는 C. S. 루이스(Lewis)가 기독교 신앙을 변증했고 20세기 초반에는 길버트 체스터턴(Gilbert Keith Chesterton)이 활동했다. 그는 한국 기독교계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C. S. 루이스의 회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당대 영국에서는 아주 유명한 기독교 변증가였다.
체스터턴은 1874년 런던에서 태어났다. 슬레이드 예술학교와 런던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각각 미술과 문학을 전공한 그는 기자로 출발했다. 체스터턴은 출판사 편집인으로 일하면서 시, 기사 그리고 미술 비평을 기고하였고, 작가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작가가 되었고 문학 경력을 쌓았다. 그는 스스로 저널리스트로 성공하기를 희망했었다.
하지만, 그는 문학적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걸출한 시인이었고, 수필가, 희곡 작가, 소설가로 세상에 알려졌다. 아울러 그는 사회와 문학을 날카롭게 비판했던 탁월한 비평가였다. 그는 수백 편의 시, 다섯 편의 희곡, 다섯 권의 장편소설, 환상소설 그리고 단편소설 200편을 발표했던 다작의 작가였다.
체스터턴은 당대에 영국 사회의 유명인사였다. 그의 생애와 작품을 소개하는 작가들은 그를 ‘20세기 전반 영국의 공론장을 쥐락펴락했던 사람’으로 묘사한다. 유능한 진행자였고 탁월한 언론인이었던 체스터턴은 시사 토론으로 명성이 높았던 논객이었다. 그는 재기 넘치는 경구를 잘 구사했다.
체스터턴은 자신의 변증적 전략을 귀류법이라고 불렀다. 귀류법은 자신의 명제에 반대 명제를 전제로 추론을 전개한다. 그리고, 그 추론의 결과가 오류임을 밝히면서 자신의 명제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체스터턴이 반기독교적인 서적을 탐독하다 그들 논리의 허점을 발견하고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돌아온 경험을 반영한 것이다.
필립 얀시에 따르면 무인도에 표류하면 무슨 책을 가져가길 바라느냐는 질문에 체스터턴은 ‘배 만들기 안내서’라고 대답했었다고 한다. 당시 체스터턴의 대표적인 라이벌은 노벨문학상 수상자 조지 버나드였다. 체스터턴은 당시 영국 사회에서 버나드 쇼와 비슷한 영향력을 갖고 기독교 입장을 대변하는 변증가였다. 그는 버나드 쇼의 진보적이고 반기독교적인 입장을 비판했었다.
체스터턴은 정통신앙에 대한 오해를 정리하면서 기독교를 변증합니다. 흔히 정통주의라는 단어에 엄격하고 딱딱한 교리를 강조하는 듯합니다. 정통을 고루한 것으로 여기는 대중적 견해에 대해 체스터턴은 정통신앙을 인생의 모험과 로맨스의 원천으로 제시했다.
체스터턴이 지금 주목을 받는 이유는 C. S. 루이스 회심에 강력한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지만 체스터턴은 중요한 서적을 남긴 작가였다. 루이스가 영향을 받게 된 체스터턴의 책은 “정통”과 “영원한 사람”으로 둘 다 기독교 변증서다. C. S. 루이스는 자신의 영적 문제를 체스터턴 책으로 해결했다.
체스터턴은 루이스와 비슷한 신앙의 여정을 가졌다. 체스터턴은 루이스처럼 어린 시절에 신앙을 잃었다가, 긴 방황 끝에 신앙을 회복하였다. 체스터턴 스스로 밝히기를 열두 살 때 이방인이었고 열여섯 살에 이르러는 완전한 불가지론자가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가 기독교 신앙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반기독교적 사상이었다. 그는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탐닉하던 중 비판자들 안에 내재한 의심과 절망을 포착했고 그로 인해 기독교로 회심했다. 그는 “나를 정통신앙으로 돌아가게 한 것은 헉슬리와 허버트 스펜서와 찰스 브래들로와 같은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나의 의심에 대한 의심을 심어주었다”라고 했다.
언론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체스터턴은 1900년에 두 권의 시집을 낸 이후로 문학가로 또 평론가로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는 정치와 사회 비평가로 활발하게 활동했고 로버트 브라우닝, 찰스 디킨스, 조지 버나드 쇼 등에 대한 문학비평 분야에서 활동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1922년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 정통 신앙인 관점에서 유능한 변증가로 활약했다.
많은 작가가 체스터턴을 따르고 칭송했다. T.S.엘리엇은 “체스터턴은 영원토록 후대의 존경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이라고 칭송했고, 버나드 쇼는 “세상이 체스터턴에 대한 감사의 말에 인색하다”라고 했다. 20세기 위대한 소설가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체스터턴을 “에드거 앨런 포보다 더 훌륭한 추리 소설가”라 했다.
체스터턴은 기독교 신앙을 갖기 전에 다양한 종교와 이단을 섭렵했다. 강신술(Spiritualism), 신지학(Theosophy), 그리고 20세기에 유행했던 대부분의 이단을 거쳤다. 그 와중에 기독교를 반대하는 서적들을 탐독하다 그들의 논리에 허점을 발견하고 신앙의 자리로 돌아왔다. 이 과정에서 신실한 성공회 신자 프랜스 브록(Frances Brogg)를 만난 것은 축복이었다.
체스터턴은 신앙인이 된 후 클래리온(Clarion)이라는 신문사의 요청으로 자신의 신앙을 소개하는 글을 쓰게 되었다. 당시 클래리온의 편집장 로버트 블랫츠포드(Robert Blatchford)는 매주 다양한 사람의 신앙소개 글을 실었다. 체스터턴은 세 개의 칼럼으로 기독교 세계관을 소개하며 기독교의 합리성을 논증했다. 이글을 계기로 그는 기독교 변증가로 활동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