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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웨스턴 신학칼럼-정우현 교수]
신앙성숙의 단계-신앙성숙의 4단계
1단계: 아브라함 이야기

<span style=" font: bold 0.8em Nanum Gothic, serif ; color: green;">[미드웨스턴 신학칼럼-정우현 교수]</span> </br><span style=" font: bold 0.5em Nanum Gothic, serif ; color: fuchsia;">신앙성숙의 단계-신앙성숙의 4단계</span> </br><span style=" font: bold 0.5em Nanum Gothic, serif ; color: fuchsia;">1단계: 아브라함 이야기</span>

정우현 교수 – 미드웨스턴 침례신학대학원 석사원 디렉터

아브라함 에피소드#5(상):

이삭을 낳고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다(창 21:1-22:24)

불가능하다고 믿었는데…

드디어 고대하고 고대하던 일이 실현되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들을 낳았다.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1절) 행하셨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그 약속은 역시 이루어졌다. 그리고 사라는 웃었다(6절).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이 사라로 하여금 웃게 하셨다(6절).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낳을 때에 백세라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창 21:5-6절)

사라의 웃음에는 이런 의미가 있었다. 사라가 아기를 갖게 될 것이라는 말을 도무지 믿지 못했다. 하지만 정말 아기를 갖는다면 어떨까? 생각만 해도 즐거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 일이 실제로 발생했다. 아기를 갖지 못할 것이라는 사라의 생각은 틀렸었다. 생리학적으로 사라는 임신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녀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싶었다. 임신할 것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그때도 웃었었다. ‘말도 안 돼. 내가 경수가 끊어진 게 언젠데? 남편도 늙어 힘이 없는데 우리가 아기를 낳게 된다고??’라는 생각에 어이없어했다.

사라는 이제 생각이 바뀌었다. ‘되는구나.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일도 하나님이면 가능하구나.’ 그가 아홉 달을 태중에 품었던 아기가 지금 자신의 품에 안겨 있다. 아기가 젖을 빨며 자기의 존재를 어미의 심장에 확인시킨다. 사라는 미소가 가득한 얼굴로 아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그래 아기야. 넌 기적이야. 네 아버지 나이가 지금 백 세야. 이 어미는 이미 나이 들어 아기를 가질 수 없었어. 근데 여호와께서 기적을 베푸셨다. 넌 기적이야. 하나님께서 널 나에게 주셨어.”

신앙성숙을 위해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일 자체가 사람에게 기적이다. 기적은 역설이다. 불가능이 가능케 되는 모순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는 순간은 우리의 작은 생각 박스 밖으로 나오는 영감(inspiration)의 순간이다. 우리는 영감의 순간, 사라처럼 웃게 된다.

다 가진 것 같았는데…

가장 원하던 것을 가졌다. 고대하던 것을 소유하게 되었다. 아들 이삭을 얻었을 때 그는 백 세였다. 밥을 먹지 않아도 배불렀다. 이삭은 그에게 가장 귀중한 사람이었다. 그는 애지중지 그 젖먹이 아기를 돌보았다. 아기는 어미의 젖을 먹으며 잘 자랐다. 아브라함은 사라와 의논하여 아기가 젖을 떼는 날을 정했다. 아기가 젖 떼는 날, 온 식구가 큰 잔치를 배설했다. 이것이 행복이 아니겠는가? 무언가를 소유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만, 그렇게 행복을 주는 일은 또 다른 소유를 소비하게 한다. 이삭을 갖게 되자 생각지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소비 없이 소유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어쩔 수 없이 하나를 소유하기 위해 다른 소유를 유기해야 하는 역설적 상황을 만나게 된다. 인생 역설은 말 그대로 충격적이고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인생 역설은 곧 하나님의 섭리를 증명한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큰 복이었다. 하지만 하갈의 아이가 이삭을 괴롭혔다.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심각한 상황이었다. 하갈의 아이도 아브라함의 아이였다. 아브라함은 두 아이 모두의 아비로서 누구의 편도 될 수 없었기에 그의 근심이 깊어졌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창 21:11-13절)

근심하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답을 주셨다. 걱정하지 말고 사라가 말한 대로 하갈과 하갈의 아이를 집에서 내보내는 게 맞는다고 말씀하신다. 어미와 아이를 내보내면 광야에서 죽을 수 있었다. 하갈의 아이는 이삭을 갖기 전까지 그의 유일한 소망이었다. 이 아이도 소중했고 저 아이도 소중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걱정하지 말고 내보내라고 말씀하신다. 하갈의 아이도 한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며 아브라함이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을 알려주셨다.

사람을 믿었는데…

쫓겨난 하갈과 아이는 그렇게 광야에 버려졌다. 참혹한 인생 역설이었다. 하갈이 보기에 아브라함이 자신과 아이를 내쫓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소중히 생각한 아이를 봐서라도 버리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믿었지만 배신당했다. 믿은 만큼 배신감도 컸다. 모자는 깊은 슬픔과 좌절에 통곡했다.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하나님이 그 어린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창 21:16-18절)

제임스 파울러는 신앙 제5단계를 역설적-강화적 신앙이라고 말한다. 신앙인이 신앙 성숙의 역설적 단계에 들어섰다는 것은 전에 갖고 있던 이분법적 사고의 틀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광야에 유기된 하갈의 입장에서 보면 믿었던 아브라함으로부터 철저히 배신당한 사건이었다. 역설적으로 그렇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신뢰를 등지는 일은 악한 일인데, 그렇다면 배신하게 만든 하나님이 악하다는 말인가? 사람이 고통을 당하게 하도록 내버려 두는 하나님이 악한 존재란 말인가? 참으로 역설적이지 않은가?

성경은 역설을 꾸밈없이 드러낸다. 21절과 22절을 비교해보자. “그가 바란 광야에 거주할 때에 그의 어머니가 그를 위하여 애굽 땅에서 아내를 얻어 주었더라 그때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창 21:21-22)

이 두 구절은 두 개의 역설적 장면을 맞붙여 놓은 그림이다. 하나는 하갈이 어린아이를 데리고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죽을 고생 끝에 아이가 장성하고 결혼까지 하게 되는 장면이다. 곧바로 이어서 아비멜렉이 하나님께서 언제나 아브라함과 함께하신다는 점을 인정하는 장면이 나온다. 두 장면은 극대조다. 아브라함은 배신자다. 모자가 배신당하여 버림받고 죽을 고생을 하여 살아남았는데, 배신자 아브라함은 칭찬을 받는다. 간단히 생각해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이를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바로 앞 세 개 구절에서 공통으로 나오는 단어를 주목해보자.

17절의 “하나님이”와 19절의 “하나님이”와 20절에 “하나님이”라는 단어다. 이 세 개 구절은 광야에 버려진 두 모자가 끔찍하게 경험한 고통 스토리의 요약이다. 그들이 광야에서 통곡할 때 그들의 소리를 들었던 분이 하나님이었다. 그들이 물이 없어 죽어갈 때 샘물로 인도하신 분도 하나님이었다. 그 아이가 활 쏘는 자로 장성하도록 함께 하신 분도 하나님이었다. 그리고 아비멜렉의 말처럼 아브라함의 형통도 하나님 때문이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지켜보는 동안 쉽게 빠질 수 있는 오류를 경계해야 한다.

그 오류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브라함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주인공은 하나님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아브라함과도 함께 하셨지만 하갈과 그의 아들에게도 동행하고 계셨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이야기다.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인생 스토리를 돌아볼 때 사람이 행한 일에 주목하면 인생은 모순투성이다. 반면, 인생의 주관자 하나님을 주목하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진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

요컨대, 하나님께는 인생 역설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사람의 눈으로 이해하려고 할 때 역설적일 뿐이다. 이는 마치 원뿔 모형을 옆에서 보면 삼각형이고 아래에서 보면 둥그런 원으로 보는 것과 같다. 누구는 원뿔을 삼각형이라 하고 또 누구는 원이라고 말하지만, 원래의 모형을 아는 사람에게 그것은 원뿔이다. 원뿔을 확인하지 못한 두 사람에게는 서로 모순이고 역설이지만 원뿔을 아는 사람에게는 삼각형이든 원이든 원뿔이든 전혀 역설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한눈에 보신다. 사람은 부분적으로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성숙하다는 말은 좀 더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잘 볼 수 있다는 의미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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