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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나무 아래서](44) “과외 선생의 깨달음”

[무화과나무 아래서](44)  “과외 선생의 깨달음”

궁인 목사(휴스턴 새누리교회)

과외 선생의 깨달음

아버지의 뇌졸중으로 가정이 어려워져서 나는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정말 많이 했다. 슈퍼 점원, 이삿짐 인부, 막노동꾼, 도서관 사서, 서점 직원, 선거운동원, 웨이터, 우유배달, 신문배달, 과외선생 등등. 그래도 과외선생을 하면서 가정 살림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유명 강사는 아니었지만, 평촌을 시작으로 산본, 분당 같은 신도시 대부분과 강남에서 과외를 했고, 심지어는 수능을 한 달 앞두고 새벽 3, 4시까지 과외 하는 경우도 있었다. 벌이도 좋아서 등록금도 벌게 되고 차도 사게 되고, 작은 집도 분양받을 수 있게 되었다. 원만한 대기업 부장보다 벌이가 좋았던 때도 많았다.

과외 선생을 하면서 삶의 지혜를 많이 배웠다. 보통은 이런 것이다. 아이들 의견이 강한 집은 숙제를 적게 내주고, 가끔 놀거나 일부러 과외를 빼먹어야 과외를 오래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아이들 자신이 힘들면, 열심히 잘 가르치는 데도 과외 선생이 못 가르친다고 부모님에게 이야기해서 잘리기 때문이다. 반면, 부모님이 성적에 관심이 많은 경우에는 부모의 의견이 중요하기 때문에 학습 과정을 잘 설명하고 상담을 자주 해야 한다. 이런 가정은 아이들 의견보다 학부형의 느낌이 중요해서 과외 선생이 잘 챙긴다는 이미지를 주면 오래 할 수도 있고, 다른 학부형을 소개받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것 말고도 더 중요한 것들을 발견했다. 학부형의 종교에 따라서 잘 잘리거나, 잘 안 잘리기도 하고, 월급을 제때 받기도 하고 늦게 받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학부형 개인차는 분명히 있지만, 내 경험은 대체적으로 같았다. 무교 혹은 가톨릭 신자인 경우 과외 선생이 수업을 빠지거나, 학생 때문에 수업이 미뤄져도 대체로 정해진 날에 월급을 준다. 생각과 다르게 젠틀한 경우가 많다. 특별히 성당에 다니는 경우에는 당시 가톨릭의 ‘내 탓이오’ 캠페인 때문인지 몰라도, 성적이 떨어져도 ‘내 탓이오’ 과외 수업을 빠져도 ‘내 탓이오’라고 여기고 과외선생에게 특별한 부담을 주지 않았다.

불자도 상당히 멋지다. 이들은 과외선생이 빠지든, 학생이 빠지든 비교적 정확한 날짜에 월급을 줬다. 재미있는 것은 불심이 깊을수록 더 정확하게 준다. 또 성적이 많이 떨어져도 좀처럼 자르지 않는다. 자비를 베풀어야 극락왕생할 수 있다고 믿어서인지 불쌍한 과외선생에게 넉넉한 자비를 베풀어 준다.

그러나 기독교 가정은 좀 달랐다. 과외 선생 때문이건 학생 때문이건 대체적으로 수업을 빠질 경우 보충을 해야 과외비를 주고, 학생 성적이 조금만 떨어져도 잘리는 경우가 많았다. 학부형의 신앙 연수가 오래될수록 이 경향은 정확해졌다. 성경 말씀과 같이 뱀처럼 지혜로운 분들이 많았다.

그때 왜 기독교인들만 이런 경우가 많은지 정말 많이 생각했다. 그러다 깨달음을 얻었다. 천국행 티켓을 손에 쥐고 있는데, 사랑과 선행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 땅에서 선택할 일은 오로지 축복받고, 성공하는 것만 남았던 것이다. 성경에는 사랑하라고 하지만, 이것은 나의 이익에 합당한 경우만 해당되는 것이고, 아무나 사랑하지 않았다. 오히려 축복과 성공만 선택했다. 천국행은 이미 따 놓은 당상이니 불자처럼 자비와 자선을 베풀어야 할 필요도 없고, 선행과 구원이 별개다 보니 선을 행하는 것보다 축복에 관심이 더 많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 아는 이야기지만 놀랍지 않은가? 우리의 자아상이!

물론 나도 학부모가 되고 보니, 그때의 그분들처럼 보충을 해야 과외비를 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손해 보고 살 수 없고, 남이 다 받는 축복은 나와 내 자식도 반드시 받아야 되고, 사랑과 선을 베풀기보다는 내 축복을 선택하기 바쁘니까 그렇다. 그런데 이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일까? 천국행 티켓을 확보했다고, 축복이라는 옵션만 선택하는 삶이 진정 예수님이 원하는 삶일까?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분노하시는 삶이다.

예수님이 분노하는 걸 상상하기는 참 힘들다. 간음하다 붙잡혀온 여인이나, 남성 편력이 심했던 수가성 우물가 여인을 대했던 예수님의 모습은 사랑, 희망 그리고 용서뿐이었다. 예수님은 악독한 사기꾼으로 지탄받고 있는 세리와도 먹고 마시며 교제하였다. 그들의 죄악을 문제 삼지 않았다. 사회적으로 지탄받던 세리와 부정한 여인들 그리고 베데스다 연못가에 방치된 38년 된 병자 같은 모든 버려진 사람들을 품었다. 우리가 기억하는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 떼처럼 기진한 채 방황하는 우리 모두에게 연민과 안타까움을 품고 불쌍히 여기셨던 사랑의 예수님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화낸다는 것은 더더욱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런데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등 모든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분노 사건이 있다. 이 분노는 종교 전문가였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향한 것이었다. 예수님이 성전을 뒤엎었던 성전 정화 사건이다. 예수님의 분노는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 때문에 촉발되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성전에서 장사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분노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다.

사람들이 성전에서 장사를 했던 것보다 장사했던 위치가 더 문제였다. 이들이 좌판을 깔았던 장소는 이방인의 뜰이라는 곳이다. 이곳은 이방인이지만 하나님께 기도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예배하는 장소였다. 누가복음 18장에서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하던 세리가 기도했던 장소도 바로 이곳이다. 그런데 이방인들이 예배하고 기도할 수 있는 그곳에 좌판을 깔아 예배와 기도의 공간을 없애 버렸다. 그렇다. 예수님은 예배와 기도의 자리를 줄여버린 사람들 때문에 분노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마음도 이렇지 않은가. 하나님을 향해 온전해야 할 마음이 뱀처럼 지혜롭게 살고 내 욕심을 채우는 일에만 관심을 가지고, 주님의 사랑과 희생과 헌신으로 가득해야 할 마음에는 천국행 티켓은 챙겼으니 이제는 축복이 중요하지 하는 마음만 자리잡고 있다면 우리는 꼭 이방인의 뜰을 시장으로 만들어 버린 유대인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제는 우리 마음에 있는 좌판을 치워 버려라. 하나님이 주신 소망과 비전으로 가득해야 할 나의 마음에 세상 욕망이 가득하다면 정리하라. 우리 마음에 주님의 공간이 없다면, 예수님이 여러분에게도 분노할지 모른다. 이제! 당신 삶에 선행과 헌신으로 주님의 공간을 만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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