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웨스턴 컬럼: 리더십 시리즈] 심민수 교수 – 리더십 시리즈 ⑤
심민수 교수 – 미드웨스턴 침례신학대학원
리더십 시리즈 ⑤
권력형 리더와 권위형 리더
마태복음 20장에는 우레의 아들이란 별명을 지닌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나아와 주의 나라에서 자식들을 좌우에 앉혀 달라고 청탁하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그 대화를 듣고 분개하는 제자들을 보시고는 예수님께서 그들을 따로 세우셔서 매우 강한 도전의 메시지를 던지신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26-27)”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자식을 청탁한 행위는 어찌 보면 자식을 향한 부모의 집착을 여실히 보여준 인간 군상들의 보편적 민낯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 어머니의 행위는 유대의 사회적 상황과 문화적 토양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정치권력에 의한 경제적 수탈과 성전권력에 의한 종교적 억압 상태로 인해 권력에 대한 분노와 갈증이 동시에 심화되고 있었다. 원래 세상 권력이 작동하는 곳에서는 기득권 중심부에서부터 그 아래로 하위계급이 형성되고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부조리와 불공정이 가중되면서 권력에 대해서 증오와 질시라고 하는 이중의 양상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권력은 종종 ‘자리’로 비유된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도 예수님께 나아와 두 자식의 자리를 보장해 줄 것을 청탁했다. 그 자리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제자들에게 주신 예수님의 경고 메시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 알거니와”(26) 이 경고의 메시지에는 권력의 자리에 있는 자들이 그 권력의 영향권 아래 있는 사람들을 “주관하고 그들에게 권세를 부린다”고 했다. 주관한다는 말은 주관자 맘대로 강제하고 통제한다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당하는 쪽의 자유와 권리는 무시되고 오직 주관하는 쪽의 의도와 욕구만이 작용한다. 권력의 생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권력의 연속체 현상’이라 설명한다. 즉, “에고는 타자에게서 자신의 결정을 실현하고 그를 통해 타자 속에서 자신을 연속시킨다는 것이다.(한병철, 2012: 22)” 일반적으로 인간의 자유와 욕망은 시간과 공간 이라고 하는 물리적인 한계에 머문다. 따라서 이를 확장하고 그 제한을 해체하여 자기 욕망의 한계를 넘어서고 싶은 충동을 갖는다. 이 충동은 권력을 통해 실현이 가능하다. 권력자의 이런 욕망 실현 의지를 가리켜 “권세를 부린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권력자의 욕망 실현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게 만들고 권력을 자기가 지닌 자체 능력으로 오인하게 만드는 결과로 나타난다. 이 착각은 환각적인 상태를 가져오고 이런 상태의 지속을 가리켜 권력의 중독성이라 말할 수 있다. 이 중독성은 나이와 성별을 따지지 않는다. 세상의 통치자들이 한 번 권력을 잡으면 놓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반 사회에는 권력의 생리를 따라 권세를 부리는 권력형 리더가 주종을 이룬다. 어떤 의미에서 세상에는 권력형 리더만이 존재한다고 해도 크게 과장된 말은 아니다. 초심은 달랐다고 해도 모든 리더는 결국엔 권력의 생리를 그대로 반영하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고매한 인격을 지닌 사람들이 더러 존재하기도 한다. 세상이 어지러운 때 간혹 의로운 인물이 출현하여 사익이나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대의(大義)를 위해서 자신을 헌신하는 경우가 존재할 수 있다. 또한, 상황이 어렵고 불리한 데도 개의치 않고 보람된 일을 위해 뛰어드는 사람이 초기엔 있을 수 있다. 그러다가도 모든 여건이 좋아지고 특권을 누릴 수 있는 때가 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득권을 주장하게 되고 과거의 고생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면 권력의 환경에 노출되고 자연스럽게 권력형 리더가 되는 것이다.
권력형 리더 중에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사람들을 강제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자신의 권력이 지닌 기회와 조건을 활용하여 능동적 추종자들을 발생시키는 경우도 있다. 후자를 가리켜 권력에 대한 ‘무의지적 추종 유도 기능’이라 할 수 있다. 많은 경우에 권력이 강할수록 사람들은 맞서지 않고 스스로 능동적으로 그 권력에 순종한다. 여기서 강력한 권력은 타자의 행동반경에 영향을 주거나 그것을 변화시킴으로써 부정적 제재 없이도 타자로 하여금 능동적으로 권력자의 생각을 수용하는 쪽으로 흐르게 한다. 따라서 강한 권력자들은 역사 속에서 오히려 영웅으로 추앙 받거나 많은 추종자들을 만들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권력은 커질수록 수하에 있는 자들에 대한 의존성이 높아진다는 역설도 나타난다. 권력이 커질수록 조직의 규모도 커지게 되는데 증가하는 복잡성으로 인해 사안에 대한 결정에 있어서 그 분야의 전문적인 조언을 필요로 하고 이 과정에서 조언의 위치에 있는 인물들과 자연스럽게 권력을 나누게 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어떤 권력자도 모든 사안에 대해 모든 답을 갖고 있지 못하다.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는 권력자가 있다면 그 권력은 오래가기 어렵다. 따라서 조직이 커질수록 단일 권력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며, 권력 그룹 혹은 권력 시스템이 존재할 뿐이다. 만일 큰 조직 안에 권력 분산 시스템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권력자는 모든 것을 다 책임져야 하는 위험한 상황을 자초하는 쪽으로 귀결될 수 있다.
권력형 리더에게서 나타나는 리더십의 특징은 종교 상황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역사는 종교계에서도 권력 암투가 상존해 왔음을 보여준다. 예컨대 중간기 유대 사회에 출현한 대표적인 두 종교 집단으로 사두개파와 바리새파가 있었다. 사두개파는 성전의 제사장 귀족들로서 유대교의 성전권력을 중심으로 권세를 누렸던 집단이었고, 바리새파는 율법주의를 이용하여 서민 백성들을 자신들의 손아래 통제함으로써 세를 과시했던 집단이었다. 이들의 행태는 권력에 대한 강한 집착과 무관하지 않다. 특히 사두개파가 성전권력을 독차지 하고자 했던 것은 재리와도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었다. ‘사두개’란 이름에 대해서는 다윗 시대에 제사장이었던 사독에서 유래되었다고 해석하는 학자들이 많다. 이들은 줄곧 제사장으로 이어져 왔고 마카비 시대에 대제사장 가문을 차지하였다. 따라서 헬라계 시리아 왕국인 셀류시드 왕조에 의해 팔레스틴의 헬라화가 가속화 되는 과정에서 외세에 협조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종교적 정치적 힘을 유지할 수 있었다. 외경인 마카비 상편에는 이들이 정치적 힘을 누림에 따라 종교적 열망은 사라지고 조상들의 종교 유산에 대한 변절자들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마키비상 1:15). 이들은 수적으로는 적었어도 정치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세력을 펼쳤던 귀족층이었다. 사두개파는 종교적으로는 보수주의자들이면서도 정치적으로는 진보주의자들이었다. 사두개인들의 이러한 이중적 태도는 전통종교문화의 기득권과 신흥 정치권력, 양쪽 모두에 대한 강렬한 집착에 기인하였다. 대개 종교적 보수가 정치적 보수와 결합하는 일이 많지만 사두개인들의 경우에는 그들의 주요 관심사가 권력 유지에 있었기 때문에 어떤 정치 그룹이라도 상관하지 않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세력과 협력했다. 이것은 앞서 소개한 강력한 외세 권력에 의한 ‘무의지적 추종 유도 기능’이 드러난 종교집단 사례라 할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