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단상 牧會斷想] 어른인 나를 어린 왕자가 힘들게 하고는
“어른인 나를 어린 왕자가 힘들게 하고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읽고 있었다. “나는 내 걸작을 어른들에게 보여 주며 내 그림이 무섭지 않으냐고 물어보았다. 어른들은 대답했다. ‘아니, 모자가 왜 무서워?’ 내 그림은 모자를 그린 게 아니라 코끼리를 소화시키고 있는 보아뱀을 그린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른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보아뱀의 속을 그렸다. 어른들에겐 항상 설명을 해줘야만 한다. 어른들은 나에게 속이 보이는 보아뱀이나 안 보이는 보아뱀의 그림 따위는 집어치우고, 차라리 지리나 역사, 산수, 문법에 재미를 붙여 보라고 충고했다. 나는 이렇게 해서 내 나이 여섯 살 때 화가라는 멋있는 직업을 포기했다. 나는 내 그림 제1호와 제2호의 실패로 그만 기가 죽었던 것이다. 어른들은 자기들 혼자서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그때마다 자꾸자꾸 설명을 해주자니 어린애에겐 힘겨운 일이었다.”
어린 왕자는 어른들이 자기를 힘들게 했다고 하는데 되레 어른인 나를 힘들게 했다. 나는 어설픈 지식과 들통날까 조마조마한 약점들 때문에 기가 죽곤 했다. 그래서 이 눈치 저 눈치 보며, 때로는 아부하고 때로는 신의 참모나 된 듯 허풍을 떨었다. 겉으로는 다소곳이 두 손을 모았지만 머릿속의 나는 나를 팔자걸음을 걷게 하며 으스대게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행복한 생존을 위해 지혜로운 처세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처신을 잘하고 있는 내 마음속에 어린 왕자가 들어와 나의 치부 하나하나를 콕콕 집어 드러냈다. ‘무한한 축복과 천국을 낚시 미끼처럼 달아놓고 마음껏 발휘해야 할 창의력과 상상력을 고정된 틀에 가두면 어떻게 해. 존귀한 생명들이 행복을 맛보게 하려는 신앙을 가지고!’ 어린 왕자는 속상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이없어 입을 다물지 못하는 나에게 ‘영혼을 자유케 해.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비를 감상하고 이해하여 이웃과 하나 되었다 분리되었다 하며 진리에 따라 존재가치와 행복을 누리게 하라고 했더니, 율법과 예식과 교리의 문자에 노예가 되게 하다니…’ 하고는 못마땅 해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부끄러움으로 열이 나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싸 쥔 나에게 ‘사람들이 살아서 천국을 누리게 하라고 권위를 주었더니, 죽어서 갈 천국만 사모하게 하고, 천국의 열쇠나 가진 양 특권을 누리면 어떻게 해. 최소한, 왜 천국이 네 마음속에 있다고 하는지, 천국은 마치 겨자씨 한 알 같다고 하는지, 기도는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 줘야 할 것 아니야? 그다음에 자신의 이익을 챙긴다면 그래도 봐줄 수 있을 텐데. 양심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척 지그시 눈을 감고 그저 믿기만 하면 된다고 외치고 다니니… 무엇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를 구체적이고 논리 정연하게 말해주지도 않으며.’라고 몰아세우며 나를 아프게 했다.
어린 왕자는 어리벙벙해진 나에게 ‘기도에 하나님이 다 응답하면 병들고 죽을 사람이 없을 텐데…, 그래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사람들의 궁금증을 풀어주어야 하는 것 아니야? 구원이 무엇인지, 성경은 왜, 여기서는 이렇게 저기서는 저렇게 이야기하는지, 이치에 맞게 이해시켜 어둠에서 빛으로 나온 듯 살게 해야 할 것 아니야? 그런데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게 하려 감정만 뜨겁게 하면 어떻게 해. 이성과 논리를 교만의 뿌리처럼 여기게 하면서. 그리고 그것이 싫어 떠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잡으려 별의별 프로그램을 돌리고 있는 꼬락서니를 보려니…’ 했다.
실망해 기운이 빠진 듯 조용하더니 다시 팔을 들어 양손 바닥을 하늘을 향하게 하고는 ‘선과 악이 혼돈스럽게 엮인 세상에서 인간이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존귀한 기쁨을 맛볼 수 있는지 질문할 때, 분명한 답을 해 주어야 할 것 아니야? 그런데 스스로도 묻지 않고 사람들의 질문조차 할 수 없게 막고 있으니…’ 라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미안해서 숨을 죽이고 있는데 ‘예수님은 스스로 왜 다양한 이름 – 빛, 말씀, 진리, 길, 생명, 어린양, 상담자, 목자, 치료자, 구원자, 인자 등으로 부르는지 깊고 오묘한 뜻을 이해하고 예수와 생명의 관계를 가질 수 있게 해야 하는 것 아니야? 그래서 삶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의 사실관계와 진리를 이해하고 우선순위를 분별하며 질 높은 삶으로 도약하게 해야 하는 것 아니야? 내가 “왜 모자 그림을 무서워하지 않느냐”라고 물었을 때 “그딴 질문은 집어치우고 지리나 산수나 문법 공부를 하라”는 귀 막힌 어른들처럼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하고 사랑하고 전도하고 충성하라’라고 강요만 하면 어떻게 해. 그래서 저마다 고유하게 품은 탤런트를 사람들이 포기하고 살잖아. 차라리 AI나 주식, 부동산 공부나 하라고 하든지.’ 라며 어른인 나에게 눈을 흘겼다.
신비하게도 이때 내 머리에서 별처럼 반짝하는 것을 느꼈다. “예수님이 참빛”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밝은 빛 안에 나의 모든 감정과 생각을 비추어 보았다. 말하고 행동할 때의 나의 감정과 생각의 뿌리가 보였다. 때로는 경건하고 사랑 가득한 말을 하지만 내 욕망과 이기심을 채우느라 마음에도 없는 말을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때로는 자존심에 매여 허우적거리고, 때로는 모르면서 아는 척 헛웃음 짓는 내가 보였다.
발가벗겨진 내 실체가 드러나 숨고 싶었다. 그런데 어린 왕자는 ‘괜찮아, 누구나 그런 거니까.’ 그러곤 ‘그렇게 빛 안에서 자신의 진실을 볼 때 들리는 음성이 있을 거야. 양심의 소리를 듣는 사람이라면 공감이 되는… 물론 그 말을 따르면 바보가 될 것 같은 기분이 들 거야. 그렇게 살면 생존할 수 있을까? 깊은 숨을 몰아쉬게도 되고. 그래도 삶에서 실천해 봐. 그러면 감정에만 의존하던 신앙이 이성과 조화를 이루며 점점 아름답고 지혜로운 인격으로 성숙하게 될 거야. 사랑과 진리의 강한 힘에 이끌리는 느낌도 들고.’ 라며 병을 실컷 주고는 약을 주는 듯했다.
힘겹게 알의 껍질을 막 깨고 나온 병아리처럼 심장만 팔딱팔딱 뛰는 나에게 ‘이렇게 빛 안에서 자신의 내면을 보고 들리는 음성을 듣고 이해되지 않는 것을 질문하고 호소하는 것이 기도야. 그리고 이렇게 하는 기도가 하나님과의 인격의 만남이며 호흡하는 거야.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은 생명이 있고, 사랑 안에 있는 것이고, 그 삶은 어둠에서 빛으로 나온 삶’이라고 어른인 나에게 어린아이에게 하듯 따뜻하고 자상하게 설명했다. 나는 비로소 이렇게 자신에게 베풀어진 은혜 안에서 다양한 존재들이 각자의 다름을 정직하게 내어 놓고, 이해하고, 양보하고, 나누며 하나 되고 연합하는 기쁨을 맛보게 되는 생명 있는 존재가 신앙인임을 알았다. 정직하면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의미가 새롭다.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귀가 열리는 진리도 새롭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사랑 안에서 진리에 따라 살며 그 은혜를 앎으로 존귀해지는 것이 새롭다.
인간은 상상하고 창의력을 발휘하며 자연과 가족, 사회와 연결되어 있는 존재다. 그래서 숨 쉬고, 먹고 마시고, 각종 에너지를 공급받고, 배설하며 만족하고, 아름다움과 신비를 즐기고, 사랑하며 자녀를 낳고 양육하고, 어려움을 진리에서 오는 지혜와 사랑으로 오히려 복으로 되치기 하고, 서로 다른 재주와 의견을 나누고, 어우러져 힘을 배가하고, 진리와 교감하고, 윤리와 도덕의 경계까지 무너뜨리는 상상력을 다스리며 모든 순간순간을 의미 있게 즐긴다.
그런데 난 사람들에게 이러한 행복을 누리도록 돕기는커녕 되레 어린 왕자를 힘들게 했던 ‘어른’이 되게 하는 데 한몫을 했다. 결국 젊은이들이 떠나고, 죽어서 가야 할 천국과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약삭빠르게 받을 축복과 소셜을 위해 모이는 생기 없는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가 되는데 일조를 했다. 그래서 교회가 쇠하는 데도 그 이유가 무엇인지, 원인을 찾기는커녕 팬데믹의 탓으로 돌리고, 종말의 현상이라고 치부하며, 더 열심히 전도하고, 헌신하고 봉사해야 한다고 성도들을 닥달했다. ‘괜찮은 어른’인척 하면서…
이런 나를 어린 왕자는 심장을 옭아매듯 힘들게 하고서 빛 안에서 진리와 함께 사는 생명 있는 존재로 태어나게 했다. 난 상담자와 치료자, 목자의 사랑과 능력 안에서 순간순간 오만가지의 가치와 행복을 누릴 때마다 어린 왕자와 짜릿한 을한다. 눈이 밝아져 어린 왕자와 눈맞춤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리고 이들과 사랑과 신뢰와 지식과 지혜와 아름다움과 다름을 나누고 연합하고 놀이하며 예술작품을 만들며 가치 있게 행복을 누리며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