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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광 목사의 문학의 숲에서 만나는 진리의 오솔길] 기독교 문학 산책 – C. S. 루이스의 생애 산책(6)

[강태광 목사의 문학의 숲에서 만나는 진리의 오솔길]  기독교 문학 산책 –    C. S. 루이스의 생애 산책(6)

강태광 목사(World Share USA대표)

C. S. 루이스 삶과 사상 산책 (6) 

닮은 듯 다른 영혼 톨킨 교수

C. S. 루이스 인생에 옥스퍼드 동료 교수인 톨킨은 중요합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특별한 우정을 나눴습니다. 루이스의 끊임없는 격려가 없었다면, 톨킨은 <반지의 제왕>을 완성하지 못했으리라는 것은 톨킨도 인정했습니다. 루이스도 <나니아 연대기>를 쓰면서 같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톨킨을 알아봅니다. 존 로널드 R. 톨킨(John Ronald R. Tolkien)은 영국의 영어학 교수요 언어학자요 작가입니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 펨브룩 칼리지에서 1925년부터 1945년까지 고대 영어학 교수로, 1945년에서 1959년 사이에는 같은 대학 머튼 칼리지 영어영문학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톨킨은 20세기 영미문학의 10대 걸작으로 더 타임스가 선정한 <반지의 제왕>의 작가로 C.S.루이스 등과 함께 영국 3대 판타지 작가로 꼽힙니다. 

톨킨은 옥스퍼드 영어사전 편찬과 관련한 일을 하기도 했으며, 언어학 교수로도 재직했습니다. 톨킨은 언어학에 대해 관심이 많아서 그의 작품 내에 인공적인 언어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그러한 언어 중에 퀘냐와 신다린 등이 있습니다. 톨킨은 자기 작품으로 유명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고 자신의 아이들에게 환상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작품을 쓴 것으로 유명합니다. 

톨킨은 인간 세계와는 다른 세계와 다른 종족을 만들어 내었고, 이로써 현대 판타지 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크게 발전시킨 작가로 손꼽힙니다. 그의 대표적 저서로는 <반지의 제왕>과 <호빗> 등입니다. 그의 환상소설은 그를 현대 ‘판타지의 아버지’라 불리게 했습니다.  

루이스와 톨킨은 공통점이 많습니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또 두 사람은 젊은 시절 제1차 대전, 프랑스 전투에 참전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전투에서 똑같이 상처를 입었고 가까운 전우의 죽음을 목격했습니다. 루이스는 부상을 당하면서 글쓰기를 시작했고 톨킨은 두 전우를 잃고 글쓰기를 시작했습니다. 물론 영문학을 전공한 작가라는 것도 중요한 공통점이었습니다. 이런 삶의 공통분모는 두 사람의 공감대 형성에 도움을 주었고 평생 좋은 동반자로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루이스는 톨킨을 1926년에 옥스퍼드에서 만났습니다. 그 이후, 루이스의 모든 소설에는 장소나 등장인물 이름은 물론이고 설득력 있게 창조된 환상세계에서도 톨킨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루이스가 쓴 공상과학 소설의 주인공 엘윈 랜섬 박사는 영락없는 톨킨이라고 알려집니다. 

톨킨은 루이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무엇보다 톨킨은 루이스가 신앙을 갖는 데 영감을 주었습니다. 톨킨은 오랫동안 무신론자였던 루이스에게 1세기 팔레스틴 지역이라는 초라한 배경 안에서 벌어진 사건을 근거로 하는 기독교의 핵심 주장들이 지성과 상상력의 측면 모두에 호소력이 있으므로 무시해선 안 된다는 확신을 심어주었습니다. 

톨킨은 어린 시절 양친을 잃었습니다. 톨킨과 그의 형은 천주교 프랜시스 자비어 모건(Francis Xavier Morgan) 신부가 입양해서 양육했습니다. 톨킨의 삶에 모건 신부의 영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모건 신부는 톨킨 형제를 사랑했으며 그들의 학업 뒷바라지를 충분히 해 주었습니다. 부모를 잃은 톨킨 형제에게 부모요 교사요 인생 안내자요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톨킨은 신실한 신앙인으로 평생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양아버지인 모건 신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그리고 부활의 능력을 굳게 믿는 신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아울러 톨킨은 마귀의 세력과 권세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5장에서 바울이 강조하는 하나님의 은혜도 잘 이해했습니다.  

여러 상처를 통해서 불신자가 된 루이스를 톨킨이 만났습니다. 특히 루이스는 컬크 패트릭 선생의 무신론적 논리로 견고한 무신론자가 되었고 1차 대전의 상처와 아버지와의 갈등은 그의 무신론을 심화시켰습니다. 그러나 이런 무신론의 깜깜한 터널 끝에서 신앙의 회복 기회를 만납니다. 먼저는 부상병동 텐트에서 체스터톤(G.K. Chesterton)이 쓴 책을 읽으며 새 여행을 시작했고, 톨킨을 만나서 신앙을 회복하게 됩니다. 루이스와 톨킨을 얘기하자면 잉클링스(Inklings)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글에서 잉클링스를 소개했습니다만 좀 더 자세한 자료를 나누려 합니다. 잉클링스는 루이스와 톨킨 두 사람을 중심으로 시작된 문학모임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모임에 루이스의 형이 동참할 때 톨킨은 처음에 불편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루이스의 형 와니를 수용하게 되었고 더욱 향상된 만남을 위해 새로운 회원들이 초대되었습니다. 

잉클링스는 매주 목요일에 모였습니다. 목요일 저녁 식사후 루이스의 숙소에 여섯명 정도 모여서 회원이 현재 쓰고 있는 글의 낭독을 듣고 그 글에 대한 토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런 과정은 대학의 ‘펠로’로 학생들의 에세이를 교정해 주고 토론을 이끌었던 두 교수 루이스와 톨킨의 경험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입니다.  

잉클링스는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일은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찰스 윌리엄스를 추모하는 에세이 모음집을 발간한 것은 유일한 예외입니다. 루이스가 주도한 이 프로젝트에 글을 기고한 사람은 잉클링스에서 루이스 외에 네 사람이 동참했고 외부에서 도로시 세이어즈(Dorothy Sayers)가 글을 기고했습니다. 

잉클링스 멤버는 거의 독실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이 모임은 계속 모이기는 했지만 1847년 이후엔 문학적 기능은 상실했습니다. 그리고 큰 언쟁도 없었고, 뚜렷한 해단식도 없었지만, 서서히 약화하여 회원의 친목 유지 통로가 되었습니다. 잉클링스는 루이스가 톨킨과 교제는 물론 문학적 창의성과 활력을 주고받았던 교차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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