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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부 주최 ‘군지역 목회 포럼’ 화려하게 부활하다”  (1)

“목회부 주최 ‘군지역 목회 포럼’ 화려하게 부활하다”  (1)

군 지역 목회는 정체나 위축 아닌, 새로운 기회 

이호영, 김태욱, 유훈, 이사무엘 목사 강사로 군지역 목회의 과거, 현재, 미래 조명 

목회부(이사장 이호영 목사, 부장 박규석 목사)가 주최하는 “군지역 목회 포럼”이 지난 5월 15일부터 17일까지의 일정으로 라스베가스제일침례교회(이병걸 목사, NV)에서 개최됐다. 이번 포럼은 오래전에 목회부에서 진행했던 ‘군지역 목회 세미나’가 다시 부활한 것으로서 유훈 목사(알라바마제일한인침례, AL)의 제안이 이사회를 거쳐 실행에 이르렀다. “군지역 목회 포럼”의 전체 진행은 김태욱 목사(한미은혜, TX)가 맡았다. 

이번 포럼은 다시 시작하는 군지역 목회자를 돕기 위한 시작 모임으로 다시 시동을 걸기 위한 시도였다. ‘군부대 지역 목회의 과거, 현재, 미래’라는 테마로 진행된 이번 포럼은 ▲과거: 이호영 목사(씨월드침례, sCA) “지금까지 걸어 온 군지역 목회 이야기” ▲현재: 김태욱 목사 “군지역 목회의 현주소”, 유훈 목사 “효과적인 사역 대안-고목에도 꽃이 피는가?” ▲미래: 이사무엘 목사(SBC 연방군종 교구장) “군지역 선교에 대한 NAMB의 전망과 제안”의 강사가 초청돼 각 강연을 펼쳤다. 

전국에서 군지역 목회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목회자가 대부분 부부가 함께 참석했고, 시작단계인 만큼 20여 명이 강의를 듣고, 목회사역을 나누며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이번 포럼의 목표는 네 가지-① 사역 이야기 나눔: 각자의 사역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이해한다. ② PROS / CONS: 군지역 목회의 장단점을 찾아보고, 정리 및 요약한다. ③ 군지역 교회 현황: 미국 내에 소재한 군부대 지역을 파악하고, 그곳을 중심으로 세워진 교회들의 현황을 파악한다. ④ NEXT MEETING: 다음 모임에 대해 구상하고, 운영 방향을 계획한다-였다. 

김태욱 목사와 유훈 목사의 라이드를 받아 호텔에 도착, 체크인을 마친 뒤 교회로 이동해 개회 모임을 시작했다. 김태욱 목사의 인도로 다 함께 찬양을 부르고 현승헌 목사(훼이트빌한인침례, NC)가 기도한 뒤 이호영 목사가 첫 강연의 문을 열었다. 다음은 포럼의 주요 내용이다. 


“지금까지 걸어 온 군지역 목회 이야기”(이호영 목사) 

개회 강연을 이도하는 이호영 목사

군부대 교회 초창기에는 한글을 읽지 못하는 분들도 계셨다. 최초의 한글학교는 사실 이들을 위해서 시작됐다. 그런 가운데 새로운 흐름이 일었다. 작은 군부대 교회가 흡수되면서 커지던 군부대 교회가 더 커지게 되고, 가족들이 이동하게 됐는데 캘리포니아에서 조지아로, 다방면의 지역으로 이동했고, 제일 많이 이동한 것이 캘리포니아에서 워싱턴주 타코마였다. 이렇게 이주하면서 터를 잡고 교회에서 헌신하다가 남편의 발령으로 다른 지역에서 정착하면서 애로사항이 있었다. 자주 들리는 소식은 도저히 견딜 수 없다는 것이었고, 그 시대에는 그래서 이혼율이 높았다. 군인 부부가 헤어지게 되면 옵션이 있었는데, 부인이 재혼하지 않으면 지원금이 나왔다. 그래서 (남편과 함께 떠나지 않고) 남아있는 과부 아닌 과부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런 것을 보면서 군지역의 목회자들이 이들의 변화를 어떻게 잘 관리할 것인가, 또 이들의 필요를 어떻게 채워줄 것인가 고민했다. 힘들어도 같이 떠날 수 있게끔 상담을 많이 했다. 그래도 의외로 많은 가정이 홀로서기 했는데 대부분 한국에서 가족들이 오면 버팀목이 생겨서 가능했다. 대부분 상처와 아픔이 많은 이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단어를 하나 표현하더라도 신중할 필요가 있다. 

어떤 변화를 추구해야 하는가? 어떤 것을 대비해야 하는가를 이런 포럼에서 많이 논의했다. 우리 교회에서 했던 사물놀이가 이들을 하나되게 하고 뭐랄까 한을 풀어주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분들을 목회하면서 맞춰간다는 것은 잘못됐다는 것을 알게 됐다. 누구를 남겨주시고, 누가 남아있든 목회자가 할 것은 말씀과 기도뿐이라는 것이다. 때로는 그들의 아픔을 보다듬어주기도 했지만, 결국은 말씀이 그들에게 영의 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는 시대가 많이 달라졌다. 대부분 한국말은 물론 요즘 오는 분들은 영어도 잘한다. 이제는 한국에서 결혼해서 오는 경우만이 아니라 미국 본토에서 결혼해서 출석하는 경우도 많다. 매우 다양하지만 그러나 한가지, 복음은 누구에게나 말씀은 누구에게나 들어가게 된다.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그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위기 속의 솔루션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데 뭐가 두려울 것이 있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절하지 않겠다고 했다. 

물론 준비와 대비는 한다. 영어로 설교할 수 있는 메시지는 항상 준비해두고, 어떤 장르가 찾아오더라도 그들의 언어로 찾아가 줄 수 있으면 좋다. 우리 군지역을 선교지역이라고 본다. 여러 인종이 다양하게 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만이 아니라 오키나와에서 오는 분들도 있어서 일본말이 필요했다. 동양교회니까 다들 예배드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온다. 그때 ‘앗차, 우리가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구나’ 깨달았다. 이제 우리는 다민족 사역을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학교에서 열심히 영어공부한 것처럼 열심히 해야 한다. 복음의 메시지는 꼭 준비해 둬야 한다. 어떤 사람들이 영어 설교를 어떻게 준비했냐고 물어보는데 같은 설교를 반복하면 내 입에 익는다. 어느 누가 와도 준비되서 오픈할 수 있다. 과거에 글을 모르고 순수했던, 도움이 필요했던 1세대의 해가 점점 지고 있다. 아마 교회에서 권사님들이 떠나고 계실 것이다.  

이들이 바라는 것은 ‘위로’다. 그리고 맛보지 못했던 ‘사랑’이다. 에로틱한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다 하나님의 자녀다. 우리가 관심을 쏟고, 사랑을 쏟으며 섬기는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방법이다. 계속 실천하면 누구든 반드시 깨지게 돼있다. ‘이정도 가르치면 변해야 되지 않을까?’ 아직도 내 성격이 드러날 때가 있다. 그러나 이것도 내려놓아야 한다. 나도 안 변하는데 …. 어떤 교인은 목회자가 영주권만 가지면 떠난다고 하는데 나는 시민권자라고 하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라. 한번 하나님이 주신 사역지라고 믿음으로 받아들였으면, 그 지역에서 최선을 다할 때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 

이호영 목사의 강의를 마친 뒤 오리엔테이션 시간을 가졌다. 참석자들이 앞에 나와 자신의 소개를 하는 시간인데, 간단하게 하지 않고 자신의 사역과 이번에 참석하게 된 배경 등을 나누며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오리엔테이션 후에는 식당으로 이동해 저녁 식사를 나누며 교제와 나눔을 이어갔다. 이번에 주최 측은 숙소와 식사에 정성을 다해 모든 면에서 참석자들의 만족도를 높였다. 다음 날의 일정은 브런치로 시작해 포럼으로 이어졌고, 여환종 목사(생명의강, nCA)의 기도로 둘째 날의 포럼이 시작됐다.  

■ 포럼1 현재


“군지역 목회의 현주소”(김태욱 목사) 

전체 총괄 및 포럼1 강의를 인도하는 김태욱 목사

군지역 목회라고 하는데 미군 부대가 주로 있는 곳에서 파생된 교회라고 해서 군지역이라는 말을 쓴다. 그전에는 국제결혼 가정 중심 목회라고도 했다. 그런데 국제결혼이라는 단어가 좋지 않게 쓰일 때가 많아서 군인 아내가 많은 곳, 이중문화 가정 등의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우리 목회자는 용어도 용어지만, 미군과 결혼해서 같이 살아가는 아내와 그 자녀들을 대상으로 하는 목회를 하므로 잘 이해할 필요가 있고, 성경적으로 어떤 시각을 가지고 대해야 하는지도 마음에 두어야 한다. 

성경에서 국제결혼 한 가정이 많다. 보아스와 룻, 모세와 십보라, 에스더 아하수에로, 요셉과 아스낫, 신약에는 디모데의 어머니 유니게 등 시대마다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던 사람이었음이 틀림없다.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그 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세우셨다. 이외에도 많은 국제결혼 한 가정이 있었을 것이다. 

미국으로의 이민 현황을 살펴보면 도움이 된다. 미국과의 외교가 1982년부터 시작돼 이민을 많이 오기 시작했다. 그 형태에 따라 1기, 2기, 3기로 나뉜다. 1기는 1903년 1월 13일에 처음 시작돼 40년대 말까지가 해당한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노동 이민을 많이 했다. 사진만 보고 온 사진 이민, 유학생, 정치적 망명 등이다. 2기부터 미군과 결혼하는 분들이 생기기 시작해 시민권자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또 미국 시민권자가 전쟁고아를 입양, 65년까지 많이 이뤄졌다. 김복림이라는 분이 미군 시민권자의 아내로서 이민 온 현황을 파악한 자료가 있다. 1950년도에는 10명이었다. 1952년부터 점점 많아져서 1960년도에는 전체 이민자 1,500명 중에 시민권자의 아내가 650명가량, 1965년에는 2,165명의 이민자 중의 1,281명이 시민권자의 45%가 됐다. 65년부터는 이민법이 바뀌어서 시민권자의 아내로서가 아니라 본격적인 이민이 시작됐다. 1970년대부터는 미국 시민권자의 아내 비율이 급격히 줄었다. 1970년대 총이민자가 9,314명인데 미국 시민권자의 아내는 2,650명 가량됐다. 1979년에는 3만 명가량 됐는데 4천 명가량이 미국 시민권자의 아내로 이민 왔다. 전체 누적 수로는 15% 정도 된다. 그 미국 시민권자의 아내로서 95%가 미군과 결혼한 한국인 여성으로 추정한다.  

1980년대 이후에는 한인 유학생들이 학위를 취득하고 미국에 정착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90년대에는 가족 초청으로 이민자가 많아졌다.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 인구가 2,000년도에는 122만 8천 명, 2010년 170만 7천 명가량, 2015년도에는 182만 2천 명 정도가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으로 표현됐다. 그중에 미국 내 출생은 38% 타국 출생은 62%가 됐다. 1915년 기준 한국에서 출생해서 이민해서 온 사람이 123만 9천 명가량이 된다고 파악된다. 이들 중에 미군과 국제결혼 해서 미국에 온 경우는 1950~1965년까지 7,750명, 점점 늘어나서 2000년도에는 약 10만 명가량 된다고 파악된다. 훌륭한 연구지만 근사치이다. 국제결혼 해서 많이 거주한 도시는 대표적으로 타코마, 샌안토니오, 킬린이 꼽힌다. 미군 부대가 위치한 곳은 그 수가 적더라도 일정 기간 거주했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런 것을 기준으로 미국 내 한인교회 현황을 파악하면 국제결혼을 중심으로 한 교회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인데 2018년에 약 4,412개의 한인교회가 미국 내에 있었다는 자료(한인교회주소록)가 있는데 정확하지는 않다. 대략 4,500개나 5,000개로 추정해서 대도시 중심 밀집, 200개가량의 미군 부대로 추산해서 600~1,000개로 전체에서 10~20% 정도로 생각하는데 이것은 최소한으로 잡은 것이다. 30% 이상은 된다는 사람, 침례교 내에서만 봐도 많게는 50% 이상으로 볼 수도 있다. 

성도들을 이해하고 파악해야 목회를 잘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는 시대적인 구분을 할 수 있다. 시대에 따라 교육의 정도가 다르고, 한국에서 미군과 결혼한 경우, 미국에 유학 와서 미군과 또는 일반인과 결혼한 경우, 한인 1.5세 2세 부부인데 남편이 입대한 경우 등 다양한 형태가 있다. 일반인 배우자를 만난 여성은 미국교회에 가는 경우가 많은데, 군인 배우자와 결혼한 경우는 한인교회를 찾는 경우가 많다. 80년대 이후의 국제결혼 한 여성은 언어, 문화, 경제적으로도 좀 다르다. 이들은 앞으로 한인교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심리적인 부분을 주의해야 한다. 국제결혼이라는 단어의 인식이 좋지 않았다. 초기에는 국제결혼 한 사람들을 좋게 보지 않았다. 입에 담지 못할 말로 여성들을 비하하고, 가족으로 이어가기도 어렵게 했다. 이들의 심리상태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나라와 친족을 떠나 미군 남편을 만나서 태평양을 건너서 미국에 왔기 때문이다. 그분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미국에 와서 파티에 가는 것을 연상했고, 미국에 오면 다 잘 풀릴 것으로 생각했는데, 삶의 방식이 너무 달랐다. 또 특별한 곳을 제외하고는 도시와 떨어져 있었고, 밤에는 칠흑 같은 어둠이었으며 자기 혼자만 한국인이어서 불안하고, 어디를 끌려가는 것 같았다고 한다. 기대와는 달리 너무 생소한 나라였고, 두려움과 외로움이 밀려왔고, 이질감을 느끼는 너무나 불편한 나라였다. 그뿐 아니라 남편의 식구들도 만만치 않았다. 한국에서도 시댁은 쉽지 않은데, 웬 여자를 한국에서 데려왔으니… 만만치 않았다. 

모두가 열린 나라라고 하지만, 언어가 소통되지 않는 경우에 가정폭력, 성폭력, 남편의 외도, 아무런 보장 없는 이혼 등 사실은 버려지는 일이 많다. 요즘은 한인교회가 대부분 있어서 도움을 청하면 되지만, 당시에는 도움받을 곳이 없었다.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정착의 과정이 있었고, 그러다 보니 한인교회를 세우는 일에 앞장섰다.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몹시 어렵게 살아온 경우가 많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얼마나 무섭고, 자존심이 비참했을까, 고독감을 느꼈을까, 그런 고통과 고독조차 느끼기 힘들어서 무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통이 고통인지 모르고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살아왔던 사람이 많다.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인정받지 못하는, 스스로 존재감 없는 여성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심리상태를 이해하고, 한 번 더 생각하면 좀 더 이해의 거리가 가까워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남편 중에는 PTSD가 있는 경우가 많다. 어려운 상황을 넘어가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돼 준다. 추측하지 말고 그들의 삶 자체를 그대로 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호영 목사님은 초창기에 한글 교육이 시작됐다고 하셨는데, 영어를 가르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성경 교육보다 그것이 더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관심과 사랑을 오랫동안 받지 못한 경우가 많아서 사랑을 보여주면 좋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실제로 복음인 것 같다. 고차원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는 복음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어느 고상한 말도 소용이 없는 것 같고, 이해할 수 있도록 복음을 풀어주기만 해도 굉장히 말씀을 잘 받아들이고 변화되는 것 같다. 상처, 응어리진 것 등 복음 외에는 풀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면 된다. 

이 포럼을 통해 참석자들에게 유익을 줄 기회가 되면 좋겠고, 같은 길을 걸어가는 동역자들에게 작은 힘이 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시작됐다. 우리가 이 모임을 시작하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서로 나누면서 힘이 되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포럼도 만들고 네트워크를 하려고 한다.  

– ‘포럼 2 현재’ 이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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