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광 목사의 문학의 숲에서 만나는 진리의 오솔길] 기독교 문학 산책 – C. S. 루이스 삶과 사상 산책 (5)
강태광 목사(World Share USA대표)
C. S. 루이스 삶과 사상 산책 (5)
초임 교수 시절
루이스는 1925년 8월 옥스퍼드 모들린 칼리지 펠로가 되었습니다. 이 ‘펠로’는 ‘개별지도 교수’ 혹은 ‘글쓰기 개인 지도 교수’라고 번역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펠로는 학생이 준비해 온 에세이를 소리 내어 읽게 한 후 비평과 토론으로 지도하는 교수입니다. 요즘 교육 시스템으로 보면 튜터(Tutor)와 흡사합니다. 당시 영국 교육은 글을 읽고 쓰는 능력 함양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루이스는 자신의 충실한 대학 생활처럼 충실하게 학생을 지도했습니다. 루이스는 가혹하고 요구사항이 많은 개별지도 교수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게으르고 감수성이 부족한 학생들을 참지 못해서 힘들어했었다고 합니다. 성실했던 루이스 대학 생활을 아는 사람은 루이스의 펠로 생활을 걱정했다고 합니다.
이 시기에 중요한 사건은 루이스 아버지인 알버트 루이스의 사망입니다. 원래 루이스는 아버지와 관계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1차 대전에 참전해 부상을 당했던 루이스는 아버지가 병원에 와 주시기를 간청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끝내 오시지 않았고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과 실망이 컸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향한 마음을 접고 무어 부인과 더 친밀하게 지냈습니다.
아버지와 관계가 따뜻하지 못했던 루이스는 어린 시절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흠모했습니다. 반면에 아버지를 경멸하고 속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아버지가 암 진단을 받고 수술받을 때 루이스는 아버지와 함께 지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고 아버지를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한 거부감을 느끼며 오래 견디지 못했습니다. 루이스는 아버지가 오래 견디실 것으로 판단하고 새 학기 준비를 위해 병원을 떠났습니다. 아버지는 곧 세상을 떠났습니다. 루이스는 아버지 임종을 지키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루이스 고향 사람들을 분노했습니다. 아버지가 무려 6년 동안이나 막내아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는데 막내 루이스는 아버지를 홀대했다고 판단했습니다. 큰아들 와니가 중국 상해에 근무하고 있어서 대학에 재직했던 루이스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야 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루이스 자신도 한동안 아버지께 불효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루이스는 아버지가 떠난 옛집 리틀리 정리를 위해 중국 상해에 근무하던 형 와니에게 추억이 있는 집을 팔아야 하는 아픔을 고백했습니다. 곧 세 사람 즉, 루이스, 무어 부인 그리고 와니가 함께 투자해서 집(킬른스)을 샀습니다. 무어 부인이 소유권을 갖고 루이스와 와니는 영구거주권을 가졌습니다.
형 와니는 1932년 12월에 제대했습니다. 루이스는 형과 함께 킬른스에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무어 부인이 있었지만, 루이스는 형 와니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형과 함께 사는 것은 루이스에게는 새로운 삶이었습니다. 무어 부인도 루이스에게 중요했지만, 형 와니는 루이스의 평생의 친구, 후원자, 비서였습니다. 평생 타자기를 사용하지 않았던 루이스 대신 형이 타이핑을 했습니다.
루이스가 형과 함께 지낸 것은 루이스와 형 두 사람에게 유익했습니다. 특히 루이스는 정신적인 안정감도 얻게 되고 형의 도움으로 자신의 연구 활동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루이스의 왕성한 저작 활동과 강의 활동이 가능했던 것은 든든한 형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루이스가 만난 중요한 인물이 J.R.R. 톨킨입니다. 루이스의 삶에 영향을 끼친 사람들이 많지만, 부모, 형, 무어 부인 그리고 친구 J.R.R. 톨킨이 루이스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톨킨스는 루이스가 영문학을 토의하는 그룹에서 만났습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이들 두 교수의 상호 장래 학문과 저작 활동을 고양시키는 중요한 기회가 되었습니다.
루이스와 톨킨 두 사람이 주축이 되어 소규모 문학 토론 모임인 ‘잉클링스(Inklings)’를 결성했습니다. 잉클링스의 문자적인 의미는 ‘모호하고 완성되지 않은 암시와 아이디어를 찾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잉클링스는 1930년대부터 루이스와 톨킨에 의해서 시작되었는데 루이스와 톨킨 두 사람의 주변 사람들이 합세하여 건강한 토론 문화를 가졌던 클럽이 되었습니다.
잉클링스의 멤버는 루이스와 톨킨 외에 루이스의 형, 루이스의 양아들 더글러스 그래셤, 톨킨의 아들 크리스토퍼, 소설가 찰스 윌리엄스, 의사 험프리 하버즈, 변호사 오언 바필드 등입니다. 여기에 옥스퍼드 경찰서장 제임스 던더스그랜터, 성공회 목사 피터 바이드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동참했습니다. 물론 이들이 핵심 멤버이고 잉클링스 역사에는 19명의 이름이 거명된다고 합니다.
잉클링스 멤버들은 전 세계 신화, 철학, 역사와 언어를 수집하고 토론하였습니다. 잉클링스는 매주 각자가 준비한 글을 낭독하고 논평과 비평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런 잉클링스의 토론과 논평에서 톨킨의 <반지의 제왕>이나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 같은 20세기 판타지 문학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잉클링스는 이들의 문학 활동뿐만 아니라 삶의 전 분야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잉클링스를 통해 루이스가 신앙으로 되돌아오게 되었다는 것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사항입니다. 루이스와 톨킨이 각각 아들을 참가하게 했던 것도 주목해야 할 사항입니다.
루이스의 스승이요 친구였던 톨킨에 대해서는 좀 더 자세히 다룰 것입니다. 루이스는 초임 교수 생활을 충분히 누렸습니다. 학생들에게는 깐깐하지만, 성실한 교수로 인정받았고 학교 당국이 그의 교수 역량을 인정했습니다. 특히 그의 탁월한 기억력과 청중 설득력은 간간이 주어진 강의 기회로 그를 더욱 빛나게 했습니다. 초임 교수 루이스는 말과 글에 탁월함을 보였습니다.
루이스의 삶과 연구 활동에 큰 영향을 끼친 대학 초임 교수 시절은 만남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미 만났던 사람들과의 관계도 악화하거나 승화되었습니다. 이 시기의 루이스를 살피면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라고 하는 잠언 말씀이 생각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