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나무 아래서](28) 내 인생은 복음의 광고판이다
궁인 목사(휴스턴 새누리교회)
내 인생은 복음의 광고판이다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 때, 예수 그리스도는 증명된다. 그 순간이 성경 이야기가 살아있는 사실이 되는 순간이다. 우리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계심을 보여 주는 광고판이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과 같은 방식으로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세상과 다르게 살았던 한 가정의 이야기가 사사기에 나온다. 마노아 가정이다. 이들의 삶을 사사기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소라 땅에 단 지파의 가족 중에 마노아라 이름하는 자가 있더라.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하더니(사사기 13:2)’
이 구절이 알려 주는 것은 분명하다. 마노아에게 자녀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녀 없는 것이 이들이 세상과 다르게 살았다는 증거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사사기는 자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던 시대다. ‘소견에 옳은 대로 살던 시대’라는 것은 축복도 인간 마음대로 흉내 내던 시대라는 것이다. 무슨 소린가 하겠지만, 시편 127편의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그들이 성문에서 그들의 원수와 담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라는 말씀처럼 사사 시대 사람들은 자녀가 부모의 수치를 막아주는 축복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자녀가 많은 자는 축복받았다고 믿었다. 그래서 사사기 인물들은 자녀의 축복을 얻기 위해 비정상적인 방법까지 사용하였다.
‘입산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더라, 그가 아들 삼십 명과 딸 삼십 명을 두었더니(삿 12:8)’
‘압돈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더라, 그에게 아들 사십 명과 손자 삼십 명이 있어(삿 12:13)’
사사 입산은 아들 삼십 명과 딸 삼십 명 총 육십 명의 자녀가 있었고, 압돈은 아들 사십 명과 손자 삼십 명이 있었다. 압돈의 딸 숫자는 기록도 안 되어 있다. 딸까지 기록했다면 엄청난 숫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자. 한 여인이 육십 명의 자녀를 낳을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불가능한 일이 현실이 되었을까. 바로 인간적 지혜, 즉 편법이다. 당시 권력자들, 힘 있는 사람들은 아내 말고도 다른 여인을 통해서 아들, 딸들을 많이 두었다. 이들은 성문에서 수치를 당하지 않으려고 하나님의 축복마저 인간적 방법으로 흉내 냈던 것이다.
그러나 마노아 부부는 달랐다. 비록 축복의 상징인 자녀가 없어서 실패자처럼 보였지만, 편법을 동원하지도 사랑하는 아내를 버리지도 않았다. 하나님만 의뢰했고 그분이 주시는 회복을 기대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마저도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편법으로 이스마엘을 낳았는데, 마노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세상 시류를 따르지 않고 주님의 방식으로 살며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마노아 가정에 천사가 와서 자녀가 있을 것이라고 알려준다. 천사가 찾아와 자녀가 생길 것을 예언하는 것을 수태고지라 한다. 성경에는 총 4번의 수태고지가 나오는데, 그 첫 번째가 바로 마노아 부부에게 임한 것이다. 말씀대로 살았던 마노아 가정을 하나님이 진정으로 축복한 것이다.
그렇다. 인간이 만든 인조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정한 축복을 경험하는 방법은 특별하지 않다. 또 세상과 다르게 사는 방법도 특별하지 않다. 말씀대로 살고, 원칙대로 사는 것뿐이다. 정말 그것뿐이다. 그런데도 때로는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시험에 빠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들이 목회자라면 더욱 마음이 상한다. ‘목사가 어떻게 저렇게 살아, 전도사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해’ 하면서 분노하기도 하고, 그들 때문에 신앙을 포기하겠다고도 한다.
그렇지만 이것도 기억하라. 당신이 목회자에게 기대하는 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이 당신에게 기대하는 것이다. 목회자가 성경대로 살지 못할 때 실망하는 것처럼, 세상 사람들도 당신이 세상과 다르게 살지 않을 때 실망한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최소한 자신들과는 다르기를 기대한다. 말씀대로 살고 원칙대로 사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 이제는 세상과 다르게 살아보자. 우릴 도우실 주님 말씀을 기억하고 멋지게 마이 웨이를 걸어보자. 그때 세상은 당신을 통해서 주님을 보게 될 것이다.
주님이 알아서 하실 겁니다?
‘일단 믿음으로 저질렀어요, 주님이 알아서 하시겠지요.’ 우리가 곧 잘하는 말이다. 모든 것을 맡긴 듯 보이기 때문에 자못 믿음 있어 보이고, 때론 인간적 방법을 모두 내려놓은 것처럼 보여서 아주 거룩해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너무 순종적이어서 거룩해 보이기까지 한 이런 믿음을 불신앙이라고 주장하는 신학자가 있다. 미국 풀러신학교에서 기독교 철학을 가르치는 리처드 마우 교수다. 그는 자신의 언어로 이것을 ‘경건한 불가지론’이라고 했다.
사실 불가지론 자체도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는 불신앙이다. 그런데 ‘인간이 뭘 알아 하나님이 어떻게든 하실 거야’ 이렇게 말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막연히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도 불신앙이라는 것이다.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다고 고백만 하고 무책임하게 사는 자세다. 예를 들면, 성적 오르게 해달라고 기도했다면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데, 공부는 하지도 않고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하면서 놀고만 있는 형국이다.
경건한 불가지론은 몇 마디 말로 자신을 포장해서 그럴듯한 신앙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고, 하나님이 이 일을 하실지 안 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말이라도 그럴듯하게 해보자 정도가 될 것이다. 속으로는 아무것도 믿지 않고, 현실에서도 아무것도 노력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거의 믿음의 방관자이면서 립서비스만 하는 격이다. 말로는 경건해 보이지만, 신앙도, 열심도 없는 삶의 자세다. 멋져 보이지만, 믿음이 없는 것이다.
믿음이란 ‘주님이 어떻게 하시겠지’라고 습관적으로 막연히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고백하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그들을 쫓아내리라’라고 선포하고 행동으로 옮겼던 갈렙과 같이 사는 것이다.
갈렙이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말만 했다고 생각하는가? ‘하나님이 알아서 주시겠지’라고 생각만 했다고 믿는가! 그렇지 않다. 그는 세월이 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힘과 능력을 유지하기 위해 아침마다 열심히 운동하고, 조깅하고, 몸을 만들었을 것이다. 가족에게도 ‘가나안은 우리 것이다. 지금부터 준비하자’라고 선포하고 아주 작은 것부터 철저히 계획했을 것이다. 그는 결코 말로만 ‘주님이 알아서 하시겠지’라고 하지 않았다.
그렇다. ‘알아서 하시겠지’가 아니라 ‘나를 보내소서’라고 고백하는 자들이 세상을 바꾼다. 세상 속에서 주님을 증명하며, 빛나는 별처럼 살아간다. 이제는 경건해 보이는 말 만하지 말고, 삶으로 행동으로 주님의 살아계심을 증명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