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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牧會斷想] 반짝이는 눈동자들

[목회단상 牧會斷想] 반짝이는 눈동자들
지준호 목사(헌츠빌 은퇴, 자유기고가)

반짝이는 눈동자들

오랜만에 고국을 찾아 추석 명절을 보내고 있었다.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조카들이 나를 둘러싸고 앉아 즐겁게 수다를 떨고 있을 때였다. 한 녀석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정말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해 줘요?” 

“물론이지.”

시원하게 대답하고 녀석들의 눈치를 살폈다. 목사인 나에게 따지고 싶은 말들이 녀석들의 입속에서 오물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한 녀석에게서 “그런데 왜?”라는 말이 툭 튀어나왔다.

나는 재빨리 반박을 가로채었다. 

“그렇게 기도를 많이 하는데 세상에는 불공평과 불의는 그대로이고 교회는 신뢰를 잃어 쪼그라드냐 말이지?”

녀석들이 침을 꿀꺽 삼키고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내 입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뜨거운 냄비 속에서 튀밥 터지듯 반론이 터져 나왔다.

“그것도 그렇지만 자기를 믿는 자의 기도만 들어준다면 불공평한 하나님이시잖아요.”

“축구 시합 때 기도한다고 이기게 해 주면…” 

“세상이 개판되겠지.”

탁구공을 주고받듯 하고는 녀석들이 깔깔거렸다.

나는 목소리를 낮추고 차분하게 말했다.

“삶에는 선과 악, 행복과 불행이 뒤섞여 있지. 어떤 사람은 불행 속에서도 희망을 찾고, 미움과 분열을 용서와 화해로 바꾸기도 해. 그러나 행복과 풍요 속에서도 삶을 망치는 사람이 있지.”

방안이 고요해졌다. 하지만 녀석들의 눈동자들은 여전히 반짝거리고 있었다. 이때 한 녀석이 생기 있는 눈으로 따졌다.

“그렇게 어리석은 인간들을 하나님은 선한 길로 인도해야 하는 것 아니에요? 사랑이시라면서….”

“그래서 기도하라시는 거잖아.”

두 녀석의 문답으로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시선들이 내 입으로 모였다. 

“문명이 발달하기 전 연약한 인간들은 거룩하고 능력 있는 신에게 도움만 청했지. 기도에 신이 응답을 잘하게 하려고 목욕재계하고 정성을 다해 희생 제물을 드리기까지 하면서.”

“그런 맹목적인 신앙을 이용해 별의별 수단을 동원해 돈을 모으거나, 신과 특별히 가까운 사람인 양 권위를 내세워 자기 이익을 챙기는 사람들이 생긴 것 아니에요?”

“그런 가운데서도 위로받고 치료받고 얻은 용기로 어려움과 불의를 극복한 사람들도 있어요. 종교가 바른 삶의 기준이 된 것도 사실이고.”

“신과 가까워지려고 자신을 낮추고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수행을 한 사람들이 한몫을 한 것 아니에요? 그런 이들의 삶이 깊은 정신적 유산을 남긴 것이고.” 

“문제는 하나님이 분명히 살아계신다면은 아름다운 인격의 소유자가 늘어나야 할 텐데 오히려….”

“그 실망이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예술가, 사상가, 철학들을 탄생하게 한 것이 아닐까?”

녀석들이 자기 생각을 말하곤 나를 쳐다보았다. 

“종교에는 두 얼굴이 있는 것을 이해애야 해. 영혼을 자유케 하고, 사람을 살리는 치료와 위로와 희망이 되기도 하지만, 사람을 틀에 가두고 억압하기도 하지. 그래 놓고 자기 배를 채우는 족속들도 생기는 것이고. 그래서 종교가 무엇을 믿느냐 만큼이나 그 믿음이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도 살펴봐야 해.”

녀석들이 모두 천장을 바라보았다. 

“주로 기도를 세상의 모든 문제를 단번에 없애는 마술처럼 여겼지. 신의 마음을 움직이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던 거지. 때로 기도가 상황을 바꾸기도 하고, 때로는 상황에 맞설 힘과 지혜를 주는 것인데 말이야.”

“기도는 억울함을 토해내고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하나님께 부탁하는 일 아니에요?” 

“맞아. 그러나 나 자신이 바뀌고 세상을 바꾸는 일에 참여하겠다고 응답하는 일이기도 한 거야. 그런데 다양한 방법으로 감정을 자극해서 신비한 기도의 위력만 맛보려 했지. 그러며 종교가 번성하기도 했지만, 사람들의 의식이 깨어나면서 더 이상 사람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상황이 되고 있는 거 아니야?”

방 안이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중요한 건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 종교의 가치를 온전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아니에요?” 

“생명 있는 곳에는 들숨과 날숨이 있듯이 신앙도 마찬가지야. 마음을 하나님 앞에 내놓는 것이 들숨이라면, 그분의 뜻을 듣고 이해하며 삶으로 응답하는 것처럼 날숨을 쉬어야 하는 것이지.” 

“호흡하는 기도를 전제로 하는 신앙을 말하는 건가요?”

“그렇지.”

“그런데 음성도 형체도 없는 예수님과 어떻게 말하고 들어요?”

“내가 평생 해결하려 씨름한 질문이 바로 그거야.”

미소 지으며 답할 때 녀석들의 눈이 반짝거렸다. 

“소통은 입과 귀로만 말하고 듣는 것은 아니지 않아? 눈빛, 느낌, 손짓, 발짓, 얼굴 표정까지 모든 것이 소통의 수단이 되는 것 아니야?”

“그 소통에는 가시적인 상대가 있는 것이잖아요.”

“비가시적인 상대와도 다양한 소통의 도구들이 있더라고. 밝은 빛 앞에 서서 내면의 성찰과 삶의 경험을 비추며 소통이 시작되고, 양심의 소리와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소통이 깊어지는 거 아니야?”

“그래서 예수께서 자신을 “빛”이라 부르는 걸까요?”

“그래서 자신을 ‘진리’라고도 부르고, 그렇게 소통되는 것을 생명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것을 이해하며 그분이 어떤 분인지 조금씩 더 많이 알게 되는 것 같았어. 그분이 왜 길인지, 왜 사랑인지, 그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왜 생명인지, 생명의 능력이 어떻게 신앙생활에서 나타나는지를 말이야.”

반짝거리는 녀석들의 눈동자에서 평안을 느꼈다.

“이미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는 것처럼 느껴져요. 일방적으로 명령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내 마음을 열고 그분의 뜻을 헤아리며 응답하는 인격적인 관계 말이에요.”

“그러고 보니 제 자신도 소중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것이 진리와 사랑을 위해 생명을 던지게 하는 힘의 기초가 되는 것 아닐까?”

“그것이 신앙으로부터 탄생한 생명 있는 자의 능력일 것 같아요.”

“결국 호흡하는 기도를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도 잘 들을 것 같아요.”

“그 이유가 무얼까?”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 그분의 뜻을 듣는 훈련이 잘 된 사람에게 나타나는 당연한 현상 아닐까요?”

나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서로를 둘러보는 녀석들의 눈동자에선 들을 준비가 된 눈빛이 반짝거렸다. 

우리 모두는 하나 되는 기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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