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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자유교회운동 500주년, 그 시작의 도시 취리히를 가다

[특집] 자유교회운동 500주년, 그 시작의 도시 취리히를 가다

그로스뮌스트 트윈탑에서 내려다 본 취리히시
Munsterbrucke 다리에서 그로스뮌스트를 배경으로 고상환 목사 부부

오늘날 한국기독교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개혁교회(Reformed Church)의 원조를 요한 칼빈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1519년부터 취리히의 그로스뮌스트(Grossmunster) 성당에서 개혁활동을 시작한 쯔빙글리가 개혁교회를 시작한 개혁가였다. 그는 신약성경적인 교회를 이루고자 했던 매우 성경적인 개혁가였다. 주의 만찬 개념에 있어서 그는 떡과 포도주는 십자가에 못박혀 찢기시고 흘리신 예수님의 몸과 피를 ‘의미하는’(symbolize) 것이고, 대속적인 죽음을 ‘기념하는’(memorialize) 것으로 이해했다. 즉 상징설 혹은 기념설을 주장하며 매우 신약성서적인 해석을 하였다. 그러나 중세 1,000년 동안 이어온 유아세례 전통을 탈피하지 못하고 견지했다는 점에서는 온전한 신약성서적 교회를 회복하는데에는 그의 개혁에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그의 개혁도 루터와 칼빈 그리고 영국국교회 개혁가들처럼 관료후원적 종교개혁(Magisterial Reformation)의 범주에 포함되고 있다. 나는 900년 동안 거의 그대로 보존되고 있으며 남쪽 출입구 청동문에는 쯔빙글리의 일생이 묘사된 그로스뮌스터를 찾아갔다. 그곳은 취리히를 대표하는 쌍둥이 탑이 있는 대성당이다.

이 그로스뮌스터 성당에서 리마트(Limmat) 강 쪽으로 내려가면 작은 예배당(Krypta und Märtyrerstein in der Wasserkirche Zürich) 뒤에 긴 칼을 쥐고 있는 쯔빙글리 동상이 있다. 종교개혁자가 왜 칼을 쥐고 있을까? 그의 동상을 보면 왼손으로 칼을 들고 있고, 오른손으로는 가슴에 성경을 품고 있는 모습이다. 이는 그의 교회관 역시 여전히 국가(칼)와 교회(성경)가 연대하고 있었던 점을 알 수 있다. 유아세례는 그 당시에 국가(호적신고)와 교회(교적신고)와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이처럼 시의회 의원들의 눈치를 보며 유아세례를 옹호하던 스승 쯔빙글리와 유아세례를 반대하며 신앙고백을 분명히 하는 신자들(believers)에게만 뱁티즘을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의 제자 개혁파 3인방 Felix Manz, Conrad Grebel, George Blaurock과는 결국 결별한다. 개혁파 3인방이 자유교회 운동의 시작점이 되었던 재침례파(Anabaptist)의 탄생을 촉발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1525년 1월 21일 밤에 자기들끼리 Felix Manz의 집(그로스뮌스터 성당 뒷쪽의 Neustadt gasse 길에 있던)에 모여, 어릴 때 자신들이 받았던 세례를 스스로 부정하고 신앙고백에 근거한 신자의 뱁티즘을 “다시” 베풀었던(re-baptise, wieder-taupern) 것이다. 이들 아나뱁티스트들(Anabaptists)은 유아세례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로마가톨릭 교회로부터는 물론 관료후원적 개혁운동의 교회들인 루터교회, 개혁교회-장로교회, 영국국교회-성공회 등으로부터 그후 200~250년 동안 많은 박해와 핍박을 받았다. 이들의 “직접적 역사적 후예들”로는 메노나이트 교회, 후터라이트 교회, 아미쉬 교회 등이 있다. 그리고 “간접적 신앙적 후예들”로는 우리 침례교회, 그리스도의 교회, 크리스천 교회, 제자들 교회 등이 있다. 이들을 통틀어서 “자유교회 전통(Free Church Tradition) 속의 교회들” 혹은 “자유교회들”(Free Churches)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국가나 세속 권력으로부터 자유한 교회, 신자의 뱁티즘에 의한 신자들의 교회(Believers’ Church by the Believer’s Baptism), 그리고 16세기 로마가톨릭교회를 “개혁한”(reform) 교회에 만족하지 않고, 교회와 국가가 분리되어 있었던 신약성서적 교회를 “회복한”(restitute, restore) 교회를 추구하는 교회들이 바로 자유교회(Free Church)이다. 올해 2025년이 16세기 종교개혁기에 최초로 신자의 뱁티즘이 향해진 지(1525년 1월 21일)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하지만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에서는 쯔빙글리가 취리히의 그로스뮌스터 성당에서 개혁할동을 본격화했던 1519년을 기점으로 삼아, 2019년을 개혁교회 500주년의 해로 기념했다.

쯔빙글리와 개혁파 3인방과의 신학 논쟁 현장은 취리히 중심을 흐르는 리마트(Limmat) 강 안으로 들어온 사각형 건물로 당시 시청사(City Hall)였다. 젊은 개혁파 3인방과 쯔빙글리는 취리히 시청사에서 성인 침례를 주장하며 격론을 벌렸으나 결국 시의 권력을 힘입은 쯔빙글리의 승리로 끝난다. 그 결과 시청사 건너편 Schipfe(일종의 선착장)에서 1527년 1월 5일에 Manz가 수장에 의한 최초의 순교(drowning)를 당했다. 그 현장을 나는 찾아갔다. 그 강변에 있는 청동 표지판에는 “여기 리마트 강의 중간 지점에서 종교개혁 시기인 1527년부터 1532년까지 펠릭스 만츠와 다른 다섯 명의 재침례파 교도가 수장되었다. 취리히에서 1614년에 마지막으로 처형된 재침례파는 한스 랜디스(Hans Landis)였다”라는 내용이 써 있었다.

중세 취리히는 경제적으로 열악한 가운데 로마에 예속되어 있었고 당시 교황청은 수비대로 스위스 용병을 썼다. 그런데 취리히가 종교개혁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자 용병이 나라의 큰 수입원으로 로마의 눈치를 보던 스위스 5개 주 연합군은 취리히로 쳐들어왔고, 취리히는 세 배나 많은 적을 맞았다. 이때 군목으로 참전했던 쯔빙글리는 1531년 제2차 카펠 전투에서 죽임을 당한다. 쯔빙글리가 전사한 후, 하인리히 블링거(Hullinger, 1504-1575)가 그로스뮌스터와 종교개혁의 후계자직을 계승하게 된다. 그는 쯔빙글리와 함께 성찬을 단지 ‘기념’으로 보면서도 영적 임재설을 주장하는 제네바의 칼빈과 다른 점이 있음에도 제네바와 취리히 교회 사이의 화해를 가져오는 취리히 합의를 이끌었다. 결국 그 결정은 칼빈주의와 루터주의 간격은 더 멀어지며, 동시에 칼빈주의가 쯔빙글리 주의를 대체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런 공로로 그로스뮌스터 성당 벽에는 불링거의 석상이 있다.

나는 펠릭스 만츠의 생가로 추측되는 주거지역과 당시 성인 침례에 이용했다는 Felix Manz Baptismal Pool도 찾아갔다. 그리고 재침례파의 태동을 주도한 젊은 개혁자 3인방의 대표주자였던 콘라드 그레벨이 성장기에 부모와 함께 살았다는 명판이 있는 집도 찾아가 보며 자유교회운동 500주년의 의미를 되새겨 보았다. 지금까지 나의 글을 위해 많은 자료를 제공해 주신 한국침례신학대학교 교회사와 역사신학을 가르치시고 현재는 명예교수로 계신 김승진 교수님께서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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